이중에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들도 있지만 향후 수십에서 수백 년 이내에 실현될 것 같아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불원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옷, 심지어 어떤 경우 착용자의 체형을 전혀 무시한 타이즈 같은 점프수트를 입게 될 것이라는 상상이다.
하지만 지난 긴 세월동안 옷은 심미적, 기능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다양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점점 더 다양해졌을 뿐, 그 어디에서도 모든 복식이 한두 가지로 통일될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옷을 입는 영화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극도의 산업화로 인간성이 실종되고 개성이 말살된 디스토피아(Dystopia)적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개성을 가장 쉽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인 옷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패션 분야야말로 프로슈머들의 최고의 놀이터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겠지만, 패턴사나 재단사는 될 수 있다.
현재 기술로도 개인별 옷본을 자동으로 만들고, 3차원 그래픽으로 봉제된 옷의 모양을 미리 볼 수는 있다. 이것은 마치 워드프로세서로 문서를 만드는 것과 동일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프린터가 없다면 워드프로세서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패션분야의 진정한 디지털 컨버젼스를 위해서는 자동으로 옷을 만드는 기계가 필요한데, 이 기계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최고의 재단사를 ‘복제’ 해서 일을 시키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현대 기술의 발달 수준으로 볼 때 이런 기계를 보려면 앞으로도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봉제 공정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복잡하며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다.
자동 봉제 기계가 프린터처럼 대중화 될 때까지는, 전통적인 의복생산 공장이 이 일을 맡아야 한다. 수많은 프로슈머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같은 옷을 수천 벌씩 만드는데 최적화된 공정을 넘어서 한 벌씩 주문받은 옷이라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공정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까지나 엔지니어 중심적인 생각이며, 사람들은 유명 디자이너의 안목에 편승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스스로 디자인해서 만든 옷을 별로 입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그런 심리마저 고려한 방법은 등장할 것이고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컨버젼스가 패션분야를 좌우하게 될 것이므로 업계도 거기에 대비를 해야 한다.
천하를 호령하던 2G폰이 스마트폰의 등장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엄청난 자본이 투자된 대량 의복 생산 체제도 다품종 소량 생산체제로 진화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시장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패션산업 관련 종사자들은 특유의 높은 안목 때문에 현재의 낮은 기술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며 신기술 도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가상현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매장에 가서 옷을 손으로 한번 쓱 만져보고 입어보는 느낌을 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패션분야 디지털 컨버젼스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은 곤란하다.
처음 CAD(Computer-Aided Design)나 워드프로세서가 나왔을 때는 기능이 너무나 빈약해서 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글씨를 쓰고 도면을 그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설계를 하고, 문서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지 않았는가.
또한 일부 사람들은 자동차가 보급될 때 마부들이 그랬듯이 디지털 컨버젼스가 패턴사나 재단사의 일자리를 뺏을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한다. 하지만 실직한 마부가 운전사가 된 것처럼, 옷을 만드는 일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들도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툴을 다루는 기술자로 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