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   Sign up
News > Opinion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③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9
 
KoreaFashionNews 기사입력  2017/01/12 [14:39]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영정 -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원 간섭기의 왕족들이 거의 그렇듯 공민왕도 원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한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은 원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때 평생의 반려자 노국대장공주를 만나 결혼하여 원에서 생활하다가 충정왕이 원에 의해 폐위되자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왕이 되자마자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할 때 파악한 원의 쇠퇴를 믿고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펼쳤다. 노국대장공주는 고려 31대 공민왕의 왕비. 원나라의 황제인 원무종 카이산과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의 아버지가 되는 순종 다르마발라의 증손녀다. 공민왕과의 각별한 금슬로 유명하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여러가지의 개혁을 시도하려던 공민왕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안겨주면서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된다.     © KoreaFashionNews

 

 

◈ 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 원(元)나라, 탐라를 목마장(牧馬場)으로 삼다

 

1277년 고려 충렬왕 3년 3월, 탐라(耽羅)에 대기(大饑 ; 큰 기근. 굶주림. 흉년)가 들었다.


같은 해 7월, 중서성(中書省)에서 글을 올려, 병량(兵糧 ; 군량)을 가져다 탐라(耽羅)와 합포(合浦)에 주둔하는 수군(守軍 ; 수비군)에게 주기를 청하고, 또 주검(鑄劍 ; 쇠를 녹여 칼을 만드는 것), 채금(採金 ; 금을 캐는 것), 공삼(貢蔘 ; 인삼을 바치는 것) 등의 일을 파(罷 ; 폐지)해 주기를 청하였다. 원(元)나라가 이 지역에 목마장(牧馬場 ; 말 사육장. 목장)을 설치했다


1278년 고려 충렬왕 4년 2월,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 탑자적(塔刺赤)이 원(元)나라에서 돌아왔는데, 원(元)나라 황제가 임금에게 해동청(海東靑 ; 매)을 보내 왔다.


1281년 고려 충렬왕 7년 가을 7월, 원(元)나라 황제가 탐라 진수군(鎭戍軍) 50명으로 하여금 육지에 나와 경종(耕種 ; 농사짓다)하게 하였다.


1282년 고려 충렬왕 8년 2월, 원(元)나라에서 몽한군(蒙漢軍 ; 몽고족과 한족 군사) 1천4백명을 보내어, 탐라(耽羅)에 지키게 하였다. 같은 해 8월, 장군 홍자한(洪子翰)을 탐라 방호부사(耽羅防護副使)로 삼았다. 같은 해 12월, 원(元)나라에서 본국(本國)으로 하여금 관원을 파견하여, 탐라진수군(耽羅鎭戍軍)을 관령(管領 ; 통솔)하게 하였다.


1283년 고려 충렬왕 9년 봄 정월, 원(元)나라에서 백자개(伯刺介)를 보내어 탐라(耽羅)의 향장목(香樟木)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 9월, 호군(護軍 ; 장군) 박수(朴秀), 최원로(崔元老)를 탐라(耽羅)에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 탑자적(塔刺赤)이 원(元)나라에서 돌아와 임금에게 향(享 ; 향연. 잔치)을 베풀고, 말 2필을 바치며 혼인을 청하니, 내시(內侍) 정부(鄭孚)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84년 고려 충렬왕 10년 봄 정월, 원(元)나라에서 제주에 달로화적(達魯花赤)을 보내왔다. 같은 해 6월, 원(元)나라에서 도리첩목아(闍梨帖木兒)를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제주에 지키게 하였다.

 

▲ 삼성혈 앞 돌하르방. 1930년대, 무라야마 지준 촬영. - 국내·외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근래에 생겼다. 돌하르방은 그 석상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여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리던 명칭이 1971년 8월 26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돌하르방은 ‘돌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 TIN 뉴스


1285년 고려 충렬왕 11년 봄 2월, 정전(正殿)에서 제주(濟州)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연(宴 ; 향연. 잔치)을 베풀고, 영관(伶官)인 지후(祗候) 김대직(金大直)에게 서대(犀帶 ; 물소뿔로 만든 허리띠) 1요(一腰 ; 1벌. 개)를 하사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있어 영관(伶官)은 최고가 7품(七品)으로 제한되었는데, 행신(幸臣 ; 순행자, 사랑받는 신하) 이정(李貞)이 임금에게 풍(諷 ; 간하다)여 이를 하사한 것이다.


1288년 고려 충렬왕 14년 2월,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에 의하면> 마축자장별감(馬畜滋長別監)을 두었다. 이보다 앞서 제도(諸島 ; 여러 섬)에 말을 방목해 번식(蕃息)시키게 한 다음, 장자(壯者 ; 강한 말)를 가려 상승(尙乘 ; 상승국)의 임금 말을 먼저 충당하고, 나머지는 제왕(諸王 ; 왕자 등 왕족), 재보(宰輔 ; 재상), 문무신료(文武臣僚)에게 하사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탐라(耽羅)에서 산출된 것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역적(逆賊 ; 삼별초)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부터 원(元)나라가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육지로 나와 살게 하고, 탐라를 따로 자기들에게 직속시키는 바람에, 말의 사육이 활발하지 못해 세공(歲貢)으로 바치는 말의 숫자가 너무 적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친조(親朝 ; 원나라에 가는 일)하거나 정벌을 도울 일이 있으면 와관(外官 ; 지방의 관리)들로 하여금 말을 바치게 했고, 또 백관(百官)들로부터 품계에 따라 염출하게 했으며, 심지어 외군(外郡 ; 지방 고을)의 양마(良馬 ; 좋은 말)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니 온 나라가 고통을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 의논해 우리 벼슬아치를 두어 빈마(牝馬 ; 암말)와 자우(牸牛 ; 암소)를 잘 가려내어 번식시킨다면, 앞으로 필요한 수요를 댈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하자, 임금이 이렇게 명령한 것이다.


1293년 고려 충렬왕 19년 9월, 원(元)나라에서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을 교지(交趾)로 류(流 ; 류배. 귀양)보내고, 우승(右丞) 아살(阿撒)을 이에 대체하였다.


1294년 고려 충렬왕 20년 5월, 임금이 4사(四事 ; 네 가지 사항)를 원(元)나라 황제에게 요청하였는데, 1청(一請 ; 첫번째 요구)은 탐라(耽羅)를 되돌려 줄 것, 둘째는 피로(被虜 ; 포로)로 와 있는 인민(人民 ; 백성)을 돌려 줄 것, 셋째는 공주(公主)를 책(冊 ; 책봉)하여 줄 것, 넷째는 임금의 작명(爵名)을 추가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명하여, “탐라는 도로 본국(本國)에 예속하게 하고, 피로(被虜)와 류사인(流徙人 ; 흘러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벼슬아치를 보내어 요양행성(遼陽行省)과 함께 분간(分揀)하여 돌려 보내며, 공주의 책봉은 의논하여 알리도록 하되, 국왕(國王)의 작명은 이미 여러 번 내렸으니 우선 내년까지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같은 해 11월, 탐라왕자(耽羅王子) 문창유(文昌裕)와 성주(星主) 고인단(高仁旦)에게 홍정(紅鞓 ; 빨간 빛깔의 가죽띠), 아홀(牙笏 ; 상아로 만든 홀), 모개(帽盖 ; 모자), 화(靴 ; 가죽신발) 등을 하사하였다. 탐라가 이제 아고(我故 ; 우리나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이런 물품을 하사한 것이다. 그러나, 마(馬 ; 말)는 원(元)나라에 진상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직금의(織金衣 ; 금빛깔의 직물로 만든 옷. 의복) 2습(二襲 ; 2벌)을 주었다.

 

▲ 팔준도(八駿圖)는 말을 소재로 한 그림 중에 여덟 필의 준마(駿馬)를 그린 것으로 조선초 태조(太祖)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공을 세운 여덟마리의 준마(駿馬)를 세종(世宗) 때에 호군(護軍) 안견(安堅)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태조팔준도(太祖八駿圖)에 근거하고 있다. 18세기 숙종(肅宗)대에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공훈을 세운 말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려는 뜻에서 팔준도(八駿圖)를 다시 제작하였는데, 이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팔준도 중 서리가 어린 것 같이 흰색의 말이란 뜻의 응상백(凝霜白)으로 제주 산(産), 위화도 회군 때 탔다. © TIN 뉴스

 

 

◎ 탐라(耽羅)를 제주(濟州)로 고치다

 

1295년 고려 충렬왕 21년 3월, 원(元)나라에서 백첩목아(白帖木兒)를 탐라에 보내어 말을 가져 갔다. 그 섬 이름을 탐라(耽羅)에서 다시 고쳐서, 제주(濟州 ; 물 건너쪽에 있는 고을)로 하고, 처음으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제주 목사(牧使)로 삼았다.


1296년 고려 충렬왕 22년 2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혼(李混)을 파면하였다. 과거에 임금이 탐라의 민호(民戶 ; 호구. 백성)를 문서에 등록하여 내고(內庫)에 소속시키려 하니, 혼(混)이 극력 그 불가함을 말하여 임금이 좋아하지 않았었다.


이때 도당(都堂)이 3사(三事 ; 세 가지 일)를 건의하였으니, 첫째 서북계(西北界) 사람들은 성질이 사나워서 내지(內旨)로 소요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되니, 이제부터는 도평의사(都評議司)에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고, 도평의사는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첩(牒)을 내리면 일도 잘 처리되고 인심도 편안할 것이며, 둘째, 역호(驛戶)가 도망하는 것은 흔히 갑작스러운 전명(傳命)이 번다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사자를 보내어 정리하게 할 것이며, 셋째 근일에 내지(內旨)에 의하여 사자로 가는 사람이 많아 실로 민폐(民弊)가 되고 있으니, 이후로는 반드시 도평의사를 경유하여 역(驛)에 발급한 뒤에 다니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모두 사랑받는 자들의 소행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질(疾 ; 미워하다)하여서 임금에게 참소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노(怒)하여 순마관(巡馬官)에게 명하여 도당의 벼슬아치 이우(李紆)를 잡아다가 창의자(倡議者 ; 앞장서서 발의한 자)를 물으니, 우(紆)가 말하기를, “이 일은 다 내가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고종수(高宗秀)에게 명하여 기필코 그 내용을 알아내라고 해서 혹독하게 매를 때리니, 우(紆)가 무복(誣服 ; 허위로 자백)하여 혼(混)을 지적하였기 때문에 혼(混)을 순마옥(巡馬獄 ; 감옥)에 가두고 드디어 파면한 것이다.


원(元)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탐라의 축사(畜事 ; 말 기르는 일)를 처리하였다. 같은 해 5월, 장군 이연송(李連松)을 원(元)나라에 보내어 탐라에서 나는 피화(皮貨 ; 귀한 가죽물품)를 바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오인영(吳仁永)은 저포(苧布 ; 삼베. 모시)를 바치고, 대장군 남정(南挺)은 탐라의 말을 바치고, 상장군 최세연(崔世延)은 요 (鷂 ; 매)를 바치게 하였다.


1297년 고려 충렬왕 23년 정월, 낭장(郞將) 황서(黃瑞)를 원(元)나라에 보내어 금진옹기(金盡甕器 ; 금빛깔의 옹기)와 야계(野雞 ; 들판에서 잡은 꿩), 탐라의 우육(牛肉 ; 쇠고기)을 바쳤다.


같은 해 11월, 상장군(上將軍) 김연수(金延壽)를 원(元)나라에 보내어, 인삼(人參)과 탐라의 수유(酥油 ; 기름) 등의 물품을 바쳤다.


1298년 고려 충렬왕 24년 11월, 장군 이백초(李白超)를 원(元)나라에 보내어 탐라(耽羅)의 육(牛肉 ; 쇠고기)을 바쳤다.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에 의하면, 임금이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서해도 절령(岊嶺) 등 7개소의 참역(站驛)과 회원(會源), 탐라(耽羅), 연로(沿路)의 참호(站戶)들은, 지난번 일본을 정벌할 때 각 도의 인호(人戶) 및 유망민들로 하여금 연한을 정해 들어와서 거주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둔 채 교체시키지 않았으며, 혹은 사망자가 발생하면 원 거주지로 하여금 그 수를 채우게 하고, 말도 그와 같이 하기 때문에 원망이 매우 심하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꼭 파견할 수 있는 자를 골라 뽑아 참역(站役)에 충당하고 각 읍(邑)의 인호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라고 하였다>.

 

▲ 기황후(奇皇后, 1315년 - 1369년)는 원나라 혜종의 황후이다. - 1356년(공민왕 5)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 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 TIN 뉴스


1300년 고려 충렬왕 26년, 원(元)나라의 황태후(皇太后)가 또 직접 구마(廐馬 ; 말. 마구간)를 방목하다가, 1305년 고려 충렬왕 31년, 도로 우리나라에게 소속시켰다.

 

1301년 고려 충렬왕 27년 3월, 원(元)나라에서 탐라군민만호부(耽羅軍民萬戶府)를 설치하였다. 같은 해 5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민훤(閔萱)을 원(元)나라에 보내어, 보탑실령공주(寶塔實怜公主)를 개가(改嫁)시킬 것과,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폐지하고 본국(本國)에 예속시켜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할 것과, 또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백성인 홀자알(忽刺歹) 등이 상국(上國)의 위령(威靈 ; 위엄)을 믿고, 다른 사람들의 토전(土田 ; 토지. 밭)과 인민(人民 ; 노비)을 빼앗은 것이 매우 많으니, 이것을 모두 본주(本主 ; 본 주인)에게 돌려주어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개가 시켜달라는 표(表 ; 표문)는 민훤이 감히 올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1309년 고려 충선왕 원년 6월, 원(元)나라에서 환자(宦者 ; 환관) 이삼진(李三眞)을 보내 와서 탐라(耽羅)의 우육(牛肉 ; 쇠고기) 바치는 일을 폐지하였다.


1318년 고려 충선왕 5년 5월, 상호군(上護軍) 배정지(裵廷芝)를 보내어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로 삼았다.


초적(草賊 ; 풀을 먹이던 사람)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강구하자, 토인(土人) 문공제(文公濟)가 병사를 동원해 모두 죽인 후, 원(元)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官吏)를 두게 했다


1340년 고려 충혜왕 원년 2월, 원(元)나라에서 패란해대왕(孛蘭奚大王)을 탐라(耽羅)에 류(流 ; 유배. 귀양)하였다.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 6월, 조득구(趙得球)를 탐라(耽羅)로 폄(貶 ; 관직을 낮추다)하게 하였다.


일찍이 왕후(王煦)가 원(元)나라에 입조할 때 득구가 수행하였는데, 왕후가 득구에게 정치(整治)할 일을 의논하였다.


득구가 말하기를,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은 유주(幼主 ; 어린 임금)의 측근에 있으면서, 군(君 ; 임금)을 나쁜 길로 인도하려 하니, 만일 정치하려 한다면 먼저 그를 제거해야 된다”라고 하였었는데, 윤충이 그 말을 듣고 한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왕후와 영돈(永旽)이 삼만(三萬 ; 기삼만)의 죽음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자, 원(元)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아뢰고자 하는데, 윤충은 득구가 왕후를 따라가서 자기를 제거하려고 도모할까 두려워서 왕(王 ; 임금)을 유(誘 ; 꾀다. 회유)하여 그를 유배하게 하였다.


1351년 고려 충정왕 3년 11월, 권성(權省) 이제현(李齊賢)이 배전(裵佺)과 박수명(朴守明)을 옥(獄 ; 감옥)에 가두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可德島)로 류(流 ; 유배)보내며, 찬성사(贊成事) 윤시우(尹時遇)를 각산(角山)으로 유배보내고,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제주목사(濟州牧使)로 폄(貶 ; 관직을 낮추다)하게 하고, 지도첨(知都僉) 한대순(韓大淳)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폄(貶)하게 하였다.


1356년 고려 공민왕 5년 9월. 벼슬아치를 각 도에 보내 제주 사람 및 화척(禾尺), 재인(才人)을 추쇄(推刷)한 후 서북면을 지키는 군졸로 보충하였다.


같은 해 10월, 제주(濟州)의 가을치(加乙赤), 홀고탁(忽古托) 등이 반(叛 ; 반란)을 일으켜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 목사(牧使) 장천년(張天年), 판관(判官) 이양길(李陽吉)을 죽였다.


1357년 고려 공민왕 6년 7월, 제주(濟州)의 성주(星主)가 와서 말을 바쳤다.


1362년 고려 공민왕 11년 8월, 탐라목(耽羅牧) 호고독불화(胡古禿不花)와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이 성주(星主) 고복수(高福壽) 등을 끼고 반란을 일으켜 만호(萬戶) 박도손(朴道孫)을 죽였다.


같은 해 10월, 제주가 원(元)나라에 예속되기를 청하니, 원(元)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1367년 고려 공민왕 16년 2월, 원(元)나라의 어의주사(御衣酒使) 고대비(高大悲)가 제주(濟州)에서 왔는데, 원(元)나라 황제가 고려 임금에게 채백(綵帛 ; 빛깔로 물을 들인 직물)과 금견(錦絹 ; 견직물)을 주었다.


이때 원(元)나라의 황제가 제주로 피란(避亂)하고자 하여, 어부(御府)의 금(金)과 백(帛 ; 직물)을 실어다 두었다. 그리고 조(詔 ; 조서)를 내려서 제주를 다시 고려에 소속시켰다.


이때 목호(牧胡)가 강성하여, 국가(國家 ; 원나라)에서 보낸 목사(牧使)와 만호(萬戶)를 자주 죽이고 배반하였는데, 김유(金庾)가 목호를 토벌하니, 목호가 원(元)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아뢰기를, “김유가 실제로 제주를 토벌한 것이 아니며, 왜적을 잡으려고 뒤쫓아 제주의 경계에 이르러 초(樵 ; 땔나무. 땔감)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목호가 망생(妄生 ; 망령된 생각. 엉뚱하게)으로 의혹(疑惑)을 품어서 서로 전이(戰耳 ; 싸우다)하게 된 것입니다. 본국(本國)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사와 만호를 보내어, 목호가 양마(養馬 ; 기른 말)를 가려서 바치기를 그 전처럼 하도록 하옵소서”라고 하니, 원(元)나라에서 그 청을 따랐다.


1369년 고려 공민왕 18년, 원(元)나라에서 파견한 제주 목자(牧子) 합적(哈赤)이 자기 힘을 믿고 마구 날뛰며, 제주 관리(官吏)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6년 뒤 1375년 8월에 임금이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 합적(哈赤)을 토벌해 처형한 후 다시 우리나라의 관리를 두었다.


1372년 고려 공민왕 21년 3월, 예부상서(禮部尙書) 오계남(吳季南)을 경사(京師 ; 명나라 서울)에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


명(明)나라에서 비서감 유경원(劉景元)을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로 삼아 오계남과 같이 탐라(耽羅)에 보냈더니, 탐라에서 유경원과 목사(牧使) 이용장(李用藏)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계남이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민부상서(民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경사에 보내어 탐라를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왜(倭 ; 왜적)가 순천(順天), 장흥(長興), 탐진(耽津), 도강(道康) 등의 군(郡)을 노략질하였다.


1374년 고려 공민왕 23년 9월, 지문하사(知門下事) 정비(鄭庇)를 경사(京師)에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다. 임밀(林密), 채빈(蔡斌) 등이 경사로 돌아가므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의(金義)를 보내어 진상하는 말 300필(三百匹)을 요동(遼東)까지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1375년 고려 신우 원년 3월, 판사(判事) 손천용(孫天用)을 경사에 보내어 말 100필을 바치게 하였다. 같은 해 11월, 제주 사람 차현유(車玄有) 등이 관해(官廨 ; 관사)를 불사르고 안무사(安撫使) 임완(林完), 목사(牧使) 박윤청(朴允淸),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그 고을 사람 문신보(文臣輔), 고실개(高實開) 등이 병사를 일으켜 모두 베어죽였다.


1376년 고려 신우 2년 5월, 제주 만호(萬戶) 김중광(金仲光)이 역적(逆賊) 합적(哈赤), 강백안(姜伯顔) 등 13명의 목을 베고, 처자(妻子 ; 아내와 자식)를 광주, 나주 2주(州 ; 고을)에 나누어서 배(配 ; 유배. 귀양)하였다.

 

▲ 고려(高麗) 말기 충정왕(忠定王) 2년인 1350년부터 박위의 대마도 원정이 벌어진 1389년 무렵까지 벌어진 왜구(倭寇)의 침공. 왜구와의 전쟁은 조선(朝鮮) 초기에도 이종무(李從茂)의 쓰시마 원정 등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일반적으로 왜구의 침공에 속절없이 당하던 고려가 진포대첩(鎭浦海戰), 황산대첩(荒山大捷) 등으로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최종적으로 박위의 대마도 원정까지 이어졌다고 서술된다. © TIN 뉴스

 


1377년 고려 신우 3년 6월, 왜적(倭賊) 2백여소(二百餘艘 ; 척)이 제주(濟州)를 노략질하고, 또 영강(永康), 장연(長淵), 풍주(豐州), 안악(安岳), 함종(咸從), 삼화(三和), 강서(江西) 등 현(縣)을 침범하였다. 같은 해 7월, 전라도(全羅道) 수군도만호(水軍都萬戶) 정용(鄭龍) 등이 왜적이 제주를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병선(兵船) 2척을 거느리고 정탐하여, 적의 배 1척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1384년 고려 신우 10년 5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김진의(金進宜)를 요동에 보내어, 세공(歲貢)하는 말 1천필을 바치고, 금(金)과 은(銀)은 본국(本國)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며, 사복정(司僕正) 최연(崔涓)을 보내어 그 수효를 감하기를 청하였다.


같은 해 8월, 제주(濟州) 만호 김중광(金仲光)이 말 104필을 바치자, 우(禑)임금이 량마(良馬 ; 좋은 말) 39필을 뽑아 두고, 나머지는 모두 폐행(嬖倖 ; 총애하고 사랑하다)하는 엄수(閹豎 ; 내시)들에게 주었다.


1388년 고려 신우 14년 9월, 군기소윤(軍器少尹) 고봉례(高鳳禮)를 제주축마(濟州畜馬) 겸(兼) 안무별감(安撫別監)으로 삼아서 보냈다.


1391년 고려 공양왕 3년 7월,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쳤다. 같은 해 12월, 전(前) 목사(牧使) 조중생(曹仲生)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말 1천필을 바쳤다.

 

▲ 탐라순력도(공마봉진, 1702년) - 보물652호인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제주도를 동,서,남,북으로 한달간에 걸쳐 순력하고 돌아온 후 여러가지 상황들을 28폴의 그림에 담아낸 도첩이며 그 중 공마봉진은 임금께 진상할 말들을 제주목사가 확인하는 모습으로 실경을 생생하고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 TIN 뉴스

 

 

◎ 고려사 지리지 ; 탐라(제주)현편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탐라현(耽羅縣 ; 제주)은 전라도(全羅道)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고기(古記)에 일컫기를, 그 곳에는 태초(太初)에 물(物 ; 사물. 물품. 땅)이나 인(人 ; 사람)이 없었는데, 3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용출(聳出 ; 우뚝 솟아 나오다)하였다.【그 주산(主山 : 한라산)의 북쪽 산기슭에 구멍이 있는데, 모흥(毛興 ; 털이 일렁이는 곳. 자궁)이라고 한다. 신인이 솟아나온 이곳이 바로 그 땅이다.】 장(長 ; 첫째. 맏이)을 양을나(良乙那 ; 어진 어린아이. 사람)라고 하였고, 그 다음을 고을나(高乙那 ; 높은 어린아이. 사람)라고 하였으며, 셋째는 부을나(夫乙那 ; 사내같은 어린아이. 사람)라고 했는데, 이 3사람은 황벽(荒僻 ; 멀고 거치른 땅)을 돌아 다니며 사냥을 하여, 피의(皮衣 ; 가죽옷)를 입고, 육식(肉食 ; 고기를 먹다)을 하였다.


하루는 자니(紫泥 ; 자주 빛깔의 진흙)로 감추어지게 봉(封)해진 목함(木函 ; 나무 상자)이 바다에서 떠다니다 동쪽 해빈(海濱 ; 해변. 바닷가)에 닿은 것을 보고 가서 열어보니, 그 상자 안에는 또 석함(石函 ; 돌 상자)이 있었으며, 홍대(紅帶 ; 빨간 빛깔의 허리 띠)에 자의(紫衣 ; 자주 빛깔의 옷)를 입은 사자(使者 ; 벼슬아치. 사신) 1사람이 따라서 나왔다.


돌 상자를 열어보니 청의(靑衣 ; 파란 빛깔의 옷)를 입은 처녀(處女) 3사람과, 많은 구독(駒犢 ; 말과 소. 망아지와 송아지)과 5곡(五穀)의 종(種 ; 종자. 씨앗)이 나왔다.


그 사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입니다. 우리나라 임금이 이 3딸을 낳고는, 서해(西海)의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3사람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그들에게 배필(配匹 ; 짝. 지어미. 아내. 부인)이 없구나 하시고는, 저에게 분부하여, 3딸을 모시고 여기 이곳으로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후 사자는 홀연히 운(雲 ;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이에 3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3여자를 나누어서 각각 아내로 맞이하고서, 천감(泉甘 ; 단물이 나오는 샘)하고면서 토비(土肥 ; 비옥한 흙)가 있는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복(卜 ; 점. 정하다)하고는 양을나(良乙那)가 거주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 ; 첫번째 도읍)라 하였고, 고을나(高乙那)가 거주는 곳을 제이도(第二都), 부을나(夫乙那)가 거주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였다.


처음으로 5곡을 파(播 ; 파종. 심다. 씨를 부리다)하고, 또 말과 소를 잘 목(牧 ; 방목. 기르다)하여서 일취(日就 ; 나날이)하여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 제주성은 고려 숙종10년(1105)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 TIN 뉴스

 

 

◎ 처음에 신라 탐진(耽津 ; 강진)에 이르렀기 때문에 탐라(耽羅)라 하다

 

15대손(十五代孫) 고후(高厚)과 고청(高靑)에 이르러 형제 3사람이 주(舟 ;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 ; 강진)에 이르니 이때는 신라(新羅)가 융성하던 시절이었다.


마침 객성(客星 ; 혜성. 신성)이 남방(南方)에 나타나자, 태사(太史)가 이국인(異國人 ; 다른 나라의 사람)이 찾아와 조회할 상(象 ; 형상. 조짐)이라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드디어 세 사람이 신라에 조회하니, 신라 임금이 가상히 여겨 장자(長子 ; 큰 아들)를 성주(星主)라 부르고【그것이 움직이는 별의 형상이라 그렇게 별이름을 지었다】, 둘째 아들을 왕자(王子)라 불렀으며【신라 임금이 고청으로 하여금 자기 과(胯 ; 사타구니) 아래쪽을 지나가 나오게 한 후 기자(己子 ;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계자(季子 ; 막내아들)는 도내(都內)라 불렀다.


읍호(邑號 ; 고을 이름)는 탐라(耽羅)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왔을 때 처음 탐진(耽津)에 정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기에게 보개(寶盖 ; 보물로 만든 덮어쓰는 모자. 관)와 의대(衣帶 ; 옷과 허리띠)를 하사하고 돌려보내 주었다.

 

자차(自此 ; 이로부터) 자손(子孫)이 번성(蕃盛)하여지고, 국가(國家 ; 나라. 신라)를 정성껏 섬기면서, 고(高)씨가 성주(星主)가 되고, 양(良)씨가 왕자(王子)가 되며, 부(夫)씨가 도상(徒上 ; 무리의 우두머리)이 되었다. 뒤에 ‘양(良)’씨를을 ‘양(梁)’씨로 고쳤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서 열거한 9한(九韓) 중에서도 탁라(乇羅)가 4번째로 나온다.


476년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 탐라국(耽羅國)의 사자(使者)에게 은솔(恩率)벼슬을 주었다.


498년 백제 동성왕(東城王) 20년에 탐라가 공부(貢賦 ; 공물)를 바치지 않으므로, 임금이 친히 정벌에 나섰는데 정벌군이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탐라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정벌을 중지했다. 그 주(註)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 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662년 신라 문무왕(文武王) 2년, 탐라국주(耽羅國主)인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938년 고려 태조(太祖) 21년, 탐라국의 태자 말로(末老)가 내조(來朝)하므로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위를 내려주었다.

 

▲ 제주읍성과 제주성문 어귀의 돌하르방 © TIN 뉴스


1105년 고려 숙종 10년,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으며, 고려 의종(毅宗 ; 1146-1170년) 때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다.


1211년 고려 희종(熙宗) 7년, 현(縣)의 석천촌(石淺村)을 귀덕현(歸德縣 : 제주 한림)으로 하였다. 1270년 고려 원종 11년, 역적(逆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섬에 들어가 거(據 ; 웅거. 의지하다)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그로부터 4년 후 고려 임금이 김방경(金方慶)에게 토벌에 나서서 평정하도록 명하였다.


1277년 고려 충렬왕 3년, 원(元)나라가 이 지역에 목마장(牧馬場 ; 말 사육장. 목장)을 설치했다. 1294년 고려 충렬왕 20년, 임금이 원(元)나라에 조회하였을 때 탐라(耽羅)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원(元)나라 승상(丞相) 완택(完澤) 등이 건의해 황제의 분부를 받아, 탐라를 다시 우리나라에게 예속시켰다.


이듬해인 1295년 을미에, 이름을 제주(濟州 ; 물 건너쪽에 있는 고을)로 고치고, 처음으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제주 목사(牧使)로 삼았다.


1300년 고려 충렬왕 26년, 원(元)나라의 황태후(皇太后)가 또 직접 구마(廐馬 ; 말. 마구간)를 방목하다가, 1305년 고려 충렬왕 31년, 도로 우리에게 소속시켰다. 1318년 고려 충숙왕 5년, 초적(草賊 ; 풀을 먹이던 사람)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강구하자, 토인(土人) 문공제(文公濟)가 병사를 동원해 모두 죽인 후, 원(元)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官吏)를 두게 했다.


1362년 고려 공민왕 11년, 원(元)나라의 예속을 요청하니, 원(元)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아 본국(本國 ; 고려)의 천예(賤隸 ; 천한 노예)인 김장로(金長老)와 함께 제주로 보내어, 만호(萬戶) 박도손(朴都孫)을 죽여서 바다에 던졌다.


1362년 고려 공민왕 16년, 원(元)나라가 제주를 다시 내속(來屬)시켰는데, 당시 목호(牧胡)가 강폭하여, 자주 국가(國家 ; 나라)에서 파견한 목사(牧使)와 만호를 죽인 후 반역을 일으키곤 했다.


김유(金庾)가 또 토벌에 나서자 목호(牧胡)가 원(元)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황제에게 본국(本國)으로 하여금 스스로 서관(署官 ; 벼슬아치)을 임명하고, 목호가 기른 말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서 예전처럼 바칠 것을 주청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1369년 고려 공민왕 18년, 원(元)나라에서 파견한 제주 목자(牧子) 합적(哈赤)이 자기 힘을 믿고 마구 날뛰며, 관리(官吏)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6년 뒤 1375년 8월에 임금이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 합적(哈赤)을 토벌해 처형한 후 다시 우리나라의 관리를 두었다.


진산(鎭山)은 한라(漢拏)로서, 현(縣)의 남쪽에 있다【한편으로는 두무악(頭無岳), 또는 원산(圓山)이라고도 하는데 그 산꼭대기에는 대지(大池 ; 큰 저수지. 연못. 백록담)가 있다.】.


또 추자도(楸子島)가 있다.【탐라(耽羅)에 가려는 사람은 나주(羅州)에서 출발하면, 무안(務安)의 대굴포(大堀浦)와 영암(靈岩)의 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 해남(海南)의 어란량(於蘭梁) 등을 거쳐서 7주야(七晝夜 ; 7일 밤낮)을 꼬박 가서 추자도에 이른다. 해남(海南)에서 출발하면 삼촌포(三寸浦)를 따라 거요량(巨要梁), 삼내도(三內島) 등을 거치게 되고, 탐진(耽津)에서 출발하면 군영포(軍營浦)를 따라 고자황이도(高子黃伊島), 노슬도(露瑟島), 삼내도(三內島) 등을 거치는데 3일 걸려서 추자도에 이른다. 앞의 3곳을 거치는 주선(舟船 ; 배)는 모두 이 섬을 경유하여서 사서도(斜鼠島), 대화탈도(大火脫島), 소화탈도(小火脫島) 등을 거쳐서 애월포(涯月浦)의 조천관(朝天舘)에 이른다. 화탈도(火脫島) 사이에는 2수(二水 ; 두 저류)가 마주쳐 흘러 파도(波濤)가 흉용(洶湧 ; 물결이 매우 세차게 일어나다)하기 때문에 왕래(往來)하는 사람들이 다들 어려워한다.】


다음호에 ‘탐라(제주)의… ④’가 이어집니다.

 

 

▲ ©TIN 뉴스

 

 

 

 

 

박원호 TINNEWS 논설위원
(재)섬유패션정책연구원 사무국장

whpark@tinnews.co.kr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기사입력: 2017/01/12 [14:39]  최종편집: ⓒ 코리아패션뉴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Daily News
래코드, 난민과 함께 하는 RE;mix Party 개최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이하 코오롱FnC)가 전개하는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Re;Code)가
라코스테, S/S 18 시즌 오프 진행
㈜동일드방레(대표 배재현)가 전개하는 프랑스 프리미엄 캐주얼 브랜드 라코스테(LACOSTE)가
준지 19 S/S 파리 컬렉션, 여성라인 기대감 UP
2019년 여성라인 출시 앞두고, 37착장 중 20착장 여성 컬렉션으로 구성9월, 파리에서 여성 커
MCM, 기성복 포함한 첫 번째 풀 컬렉션 선보여
다기능 모듈러 방식에 초경량 소재 사용한 ‘루프트 컬렉션’ 공개제품 라인업에 레디투웨어
정구호 서울패션위크 총감독, 패션디자이너연합회장 선출
현재 서울패션위크 총감독인 정구호 디자이너가 (사)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제4대 회장에 선
성별 경계를 초월한 젠더리스, 美 시장 흔든다
미국 패션․화장품 등 시장에서 ‘젠더리스’가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Ge
블라인드니스, 런던패션위크멘즈 2018 참가
국내 신진디자이너 브랜드 블라인드니스(BLINDNESS)가 지난 9일(이하 현지시간)부터 11일까지
캐시미어하우스로 비즈니스 상생을 알리다
캐시미어 전문 브랜드 캐시미어하우스를 운영하는 브론떼훼밀리 대표와 헤리티지캐시미어코리
‘Remind Andre Kim’ 전설의 부활을 노래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계의 전설 디자이너 故 앙드레 김의 추모 패션쇼 ‘리마인드 앙드레 김
건국대 의상디자인학과 졸업패션쇼 개최
건국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졸업패션쇼가 지난 5월 11일(금) 오후 7시 30분에 건국대 노천극
홍익대학원, 현대섬유미술의 무대로 도약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HOMA)에서 석사학위청구 부스개인전 및 대학원의 단체전이 5월 28일에
대학 최대 규모 동덕여대 2018 졸업패션쇼
동덕여자대학교 졸업패션쇼가 5월 15일(화) 오후 4시와 8시 2회에 걸쳐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
상명대, 2018 의류학과 졸업패션쇼 개최
상명대학교(서울캠퍼스)가 6월 1일 금요일 오후 5시와 8시, 상명대학교(종로구 홍지문2길 20
18 F/W HERA SFW STREET FASHION
2018 F/W HERA SFW STREET FASHION street fashion photo by O.F.F. 박상준
18 F/W HERA SFW STREET FASHION
2018 F/W HERA SFW STREET FASHION street fashion photo by O.F.F. 박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