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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②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9
 
KoreaFashionNews 기사입력  2017/01/12 [14:37]
▲ 배중손 사당은 고려 후기 대몽항전을 이끈 삼별초 장수 배중손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있다.     © KoreaFashionNews

 

 

◈ 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 탐라, 3별초(三別抄)의 전쟁(戰爭) 터가 되다

 

1270년 고려 원종 11년 5월, 처음에, 최우(崔瑀)가 국중(國中 ; 나라 안. 도성 안)에 도둑이 많으므로 용사(勇士)들을 모아 밤마다 돌아다니며 폭력을 금하게 하게 하였는데, 인하여 야별초(夜別抄)라 이름하였다.


도둑이 제도(諸道 ; 여러 도)에서 일어나므로 이 야별초를 나누어 보내어 잡게 했었는데, 그 군사가 너무 많으므로 드디어 나누어서 좌우(左右 ; 좌별초와 우별초)를 만들었다.


또 국인(國人 ; 백성)으로서 몽고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者)로, 그 일부(一部)를 만들어서 신의군(神義軍)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들을 일러 ‘3별초(三別抄)’라 하였다.


같은 해 6월, 장군 배중손(裴仲孫), 야별초 지유(指諭) 노영희(盧永僖) 등이 난(亂)을 일으키고, 사람을 시켜 도성 안에 외치기를, “적병(狄兵 ; 몽고병사)이 크게 이르러 우리 인민(人民 ; 백성)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구정(毬庭 ; 격구, 축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으로 모이라 라고 하니, 잠깐 동안에 국인(國人)이 대회(大會 ; 많이 모이다)하였다.


그러나 혹은 달아나 사방으로 흩어져서 주(舟 ; 배)를 다투어 강(江)을 건너기도 하고, 혹은 물 속에 침몰(沈沒)되기도 하였다.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出入)을 금지하고 강을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무릇 주(舟 ; 배)에서 내리지 않는 자는 모두 목을 베겠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이 모두 두려워서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혹은 선(船 ; 배)을 띄워 고경(古京 ; 옛 서울)으로 향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적이 소정(小艇 ; 작은 배)을 타고 쫓아가며 활을 쏘니,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성중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림(林 ; 숲)이나 수(藪 ; 늪) 속에 숨고, 동치(童稚 ; 어린 아이)와 부녀(婦女)들의 우는 소리가 로(路 ; 거리)에 요란하였다.

 

이에 금강고(金剛庫)의 병기(兵器)를 꺼내어 군졸(軍卒)에게 나눠 주고 성(城)을 둘러싸고 굳게 지켰다.


중손과 영희가 삼별초를 거느리고 시랑(市廊)에 모여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협박하여 임금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대장군 유존혁(劉存奕), 상서좌승(尙書左丞) 이신손(李信孫)을 좌우승선(左右承宣)으로 삼았다.


처음에 적이 장군 이백기(李白起)에게 함께 난을 일으키기를 꾀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니 죽였다.


장군 현문혁(玄文奕)이 도망하여 구경(舊京 ; 옛 서울)으로 달아나니, 적선(賊船) 4, 5척이 날개처럼 양쪽으로 쫓았다. 문혁이 홀로 활을 쏘아 화살을 계속 날려보내고, 그 아내가 옆에서 화살을 뽑아 주자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다가 문혁의 배가 천탄(淺灘 ; 얕은 여울)에 붙으니, 적이 쫓아와서 팔을 쏘아 맞히어 배 가운데 쓰러졌다.


아내가 말하기를, “나는 의리상 서(鼠 ; 쥐) 같은 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두 딸을 끌고 강에 빠져 죽었다. 적이 문혁을 붙잡았으나 그 용맹을 아깝게 여겨 죽이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문혁이 구경으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적(賊)이 또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을 승선으로 삼아서 정사를 잡게 하니, 문감이 말하기를, “적에게 붙어서 부귀를 누리느니보다 차라리 지하(地下)에서 몸을 깨끗이 하겠다”라고 하고 곧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 변씨(邊氏)도 물에 몸을 던졌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채정(蔡楨),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연(金鍊),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강지소(康之卲)는 난이 일어난 것을 듣고 교포(橋浦)로 도망하여 나가니, 적의 기병이 쫓았는데 잡지 못하였다.


강화(江華)에서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하여 육지로 나가니, 적이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선함(船艦 ; 배)을 모아 공사(公私)의 재화(財貨 ; 재물)와 자녀(子女)를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구포(仇浦)로부터 항파강(缸破江)까지 축로(舳艫 ; 배머리와 꼬리)가 서로 접하여 무려 1천여소(千餘艘 ; 척)나 되었다.
그 때에 백관(百官)들이 모두 임금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처노(妻孥 ; 아내와 자식. 처자)들은 모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통곡(慟哭)하는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振動)하였다.


전(前)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숙진(李淑眞), 낭장(郞將) 윤길보(尹吉甫)가 노예(奴隷)들을 모아서 남은 적을 구포에서 미격(尾擊 ; 추격)하여 5명을 죽이고, 부락산(浮落山)에 이르러, 바다에 임하여 병사의 위세를 올리니, “적이 바라보고 두려워서 적병(狄兵 ; 몽고병사)가 이미 이르렀다”하며 드디어 도망하였다.

 

▲ 고려시대 대표적인 대몽항쟁의 유적지인 전남 진도 용장산성은 1964년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었으며, 왕궁지와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 TIN 뉴스


숙진이 낭중(郞中) 전문윤(田文胤)등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쇄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니, 그 때문에 뢰자(賴者 ; 무뢰배)들이 나쁜 행동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두련가(頭輦哥) 국왕(國王)이 타자알(朵刺歹)에게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강화로 들어가게 하였다.


임금이 타자알이 유민(遺民 ; 남은 백성)을 역당(逆黨)이라 하여 죽이고 노략질할까 두려워 들어가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타자알이 듣지 않고 드디어 들어가서 병사를 풀어 재물(財物)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두련가가 주둔한 곳에 행차하였다. 그때에 처음으로 고경(古京 ; 옛 서울)에서 나왔기 때문에 의관(衣冠)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임금과 백사(百司 ; 백관)이 모두 융복(戎服 ; 군복)으로 행하였다.

 

또 해우(廨宇 ; 청사)가 없어서 모두 장막(張幕 ; 천막)을 치고 들어 있었다.


장군 양동무(楊東茂)와 고여림(高汝霖) 등이 주사(舟師 ; 수군)로 진도를 치니, 적이 장흥부(長興府)로 들어가 관군(官軍) 20여명을 죽이고, 도령(都領) 윤만장(尹萬藏)을 사로잡고, 재물과 곡식을 노략질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군사 60여명을 거느리고, 몽고(蒙古) 송만호(宋萬戶) 등의 군사 1천여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적선(賊船)이 영흥도(靈興島)에 대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방경이 치려 하자,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말리니, 적이 이에 도망하였다.

 

적중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 노유 모두 일천여명이나 되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도당이라 하여 모두 사로잡아 돌아갔다.


적이 진도(珍島)에 들어가 웅거하여, 여러 주(州)와 군(郡)을 침략하며, 황제의 명이라 거짓 꾸며서, 전라도(全羅道) 안찰사(按察使)로 하여금 백성을 독촉하여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해도(海島 ; 바다에 있는 섬)로 옮겨 살게 하였다.

 

같은 해 9월, 김방경이 몽고(蒙古) 원수(元師) 아해(阿海)와 함께 군사 1천명으로 진도를 쳤는데, 그때는 적의 기세가 매우 성하여 여러 주(州)와 군(郡)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적에게 항복하였었다.


같은 해 11월, 적(賊)이 제주를 함락시켰다. 처음에 안찰사(按察使) 권단(權㫜)이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를 보내어 병사 200명으로 제주를 지키게 하고, 또 장군(將軍) 고여림(高汝霖)을 보내어 병사 70명으로 뒤를 이었다.

 

▲ 삼별초가 제주도에 주둔한 2년 동안 항전의 거점이었던 항파두리성.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안쪽이면서 방어에 유리한 최적의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 TIN 뉴스

 

적이 제주를 공격하니 수(須)와 여림(汝霖) 등의 무리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나주(羅州) 사람 진자화(陳子和)가 적중(賊中)에 바로 들어가 장수 곽연수(郭延壽)를 죽이고 나왔다가, 또 들어가서 역시 그와 같이 하니, 사졸(士卒 ; 장수와 졸병)이 모두 기뻐서 뛰었다. 조금 뒤에 다시 들어갔다가 적에게 해를 당하니 적이 이긴 기세를 타서 관군(官軍)을 모조리 죽였다.


1272년 고려 원종 13년 8월, 원(元)나라에서 시위친군천호(侍衛親軍千戶) 왕잠(王岑)을 보내어 다구(茶丘)와 더불어 탐라(耽羅)를 정취(征取 ; 정벌)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다구가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김통정(金通精)의 무리가 왕경(王京)에 많이 있으니 그들을 시켜 부를 것이며, 불러도 듣지 않으면 그때에 공격하여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원(元)나라 황제가 이를 따랐다.


다구가 이에 통정의 질(姪 ; 조카)인 낭장(郞將) 김찬(金贊) 등 5명을 보내어 가서 유(諭 ; 타이르다. 효유)하게 하였는데 통정 등이 듣지 않고, 김찬은 억류하고 그밖의 사람들은 다 죽였다.


1273년 고려 원종 14년 2월, 원(元)나라에서 흔도(忻都), 다구 등에게 명하여 탐라를 치게 하고, 또 관군(官軍)들이 마음대로 양가(良家)의 여자를 빼앗아 여종으로 삼는 것을 금하며, 또 스스로 병장(兵仗 ; 병장기)를 마련하도록 하니 이는 고려 임금의 청원을 좇은 것이다.

 

중군행영병마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정기(精騎 ; 정예 기마병) 800명을 거느리고 흔도 등을 따라 내려가서 삼별초(三別抄)를 탐라에서 쳤다.

 

고려 임금이 월(鉞 ; 도끼. 임금의 징표)을 주어 보냈다.


대장군(大將軍) 강위보(姜渭輔)를 울릉도작목사(蔚陵島斫木使)로 삼고, 이추(李樞)와 함께 가게 하였는데, 추가 위보의 관직이 낮은 것에 노(怒)하니 이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허공(許珙)을 보내어 대신하였다.


마침내 사신을 원(元)나라에 보내어 울릉도에서 나무 베는 것을 그만두게 하게 요구하였다.


고려에서 적(賊)을 평정한 후에는, 다구 휘하(麾下 ; 부하) 500명의 의복(衣服)을 감하며, 탐라 사람들도 육지로 나오지 않게 하고, 예전처럼 각기 생업에 안착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원(元)나라 황제가 모두 들어주었다.


같은 해 4월, 흔도(忻都), 다구(茶丘) 등이 반남현(潘南縣 ; 나주)에 주둔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 했는데 제도(諸道 ; 여러 도)의 전함(戰艦)이 모두 떠내려가고 침몰되었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더불어 병사 1만명과 전함 160소(百六十艘 ; 척)로 추자도(楸子島)에서 멈추었다가 바람을 기다려 탐라(耽羅)로 들어갔다.


중군(中軍)이 함덕포(咸德浦)로부터 들어가니, 적(賊)이 암석(巖石) 사이에 복병(伏兵)하였다가 뛰어 오르고 크게 외치며 항거하였다.

 

방경이 크게 소리쳐 꾸짖고,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뛰어 나가 적의 가운데로 들어가니, 사졸(士卒)들이 세력을 믿고 다투어 나갔고, 장군(將軍) 나유(羅裕)가 선봉을 거느리고 뒤따라 와서, 죽이고 생포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楊島)로부터 바로 적루(賊壘)에 들이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듯 내성(內城)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관군(官軍)이 외성(外城)을 넘어 들어가며, 화시(火矢 ; 불화살)를 사면으로 쏘니, 연염(煙焰 ;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고,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김통정(金通精)은 그 무리 70여명을 거느리고, 산중(山中)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적장(賊將)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 등은 육단(肉袒 ; 웃옷의 한쪽을 벗는 것. 항복의 표시)을 하고 항복하였다.


방경이 휘하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니, 부녀(婦女 ; 부녀자)들이 호곡(號哭 ; 소리지르며 울다)하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궐(厥 ; 적)의 거괴(巨魁 ; 우두머리. 괴수)는 죽이되, 협박받아 따른 사람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다만 김원윤(金元允) 등 6명만 베고, 항복한 자 1천3백여명을 제선(諸船 ; 여러 배)에 나누어 있게 하며, 원래 탐라에 살던 사람은 전과 같이 편안히 자리잡고 살게 하였다.


이에 흔도가 몽고군(蒙古軍) 500명을 주둔시키고, 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고 돌아왔다.


나주(羅州)에 와서 적당(賊黨 ; 적의 무리) 35명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였으며, 크게 잔치하여 군사들을 먹이고 모든 지방의 군사를 해산시켰다.


같은 해 6월, 대장군(大將軍) 김수(金綬)를 보내어 원(元)나라에 가서 탐라의 적(賊)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였다.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개환(凱還 ; 개선)하니 임금이 홍정(紅鞓 ; 빨간 빛깔의 가죽띠) 1요(一腰 ; 1개)를 하사하고, 장사(將士 ; 장군과 사병)들에게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같은 해 윤월(閏月)에, 탐라에 유진(留鎭 ; 주둔)하였던 장군 송보연(宋甫演)이 적괴(賊魁 ; 적의 괴수) 김통정의 시(屍 ; 시체)를 찾아서 아뢰었고, 또 적장(賊將) 김혁정(金革正), 이기(李奇) 등 70여명을 수색 체포하여 다구에게로 보내니, 모두 죽였다.

 

▲ 전남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 기와(왼쪽)와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13, 14세기 연꽃무늬 수막새 기와. 용장산성에서 나온 기와는 삼별초 군의 기와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오키나와 기와와 제작 기법이나 형태가 동일 계통인 것으로 확인됐다. © TIN 뉴스


원(元) 나라에서 탐라에 달로화적(達魯花赤 ; 다루가치)을 설치하였다.


탐라를 평정한 공을 논하여,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변윤(邊胤)을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김석(金錫)을 상장군지어사대사(上將軍知御史臺事)로, 나유(羅裕), 송보연을 함께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 7월, 시중 김방경이 부름을 받아 원(元)나라에 가니, 황제가 금안(金鞍 ; 금으로 만든 안장)과 채복(綵服 ; 빛깔로 물들인 의복), 금은(金銀)을 하사하였다.


같은 해 8월, 임금이 군신(羣臣 ; 여러 신하)을 거느리고 성절(聖節 ;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는데,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도 그 관속들을 거느리고 오른쪽에 섰다.


상장군 강윤소(康允紹)도 그 무리를 거느리고 호복(胡服)으로 바로 들어와서, 스스로 객사(客使)인 척하며 임금을 보고도 절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노(怒)하였지만 제어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겨울 10월, 임금이 하교하기를, 향자(向者 ; 전번) 탐라를 토벌할 때에 경외(京外)의 별초(別抄)들 중 도망간 자가 많아 징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정(田丁)을 거두었다.


지금 천문(天文)에 누변(屢變 ; 여러 번 변괴)이 있어서, 덕(德)을 닦아 재변을 풀려 하니, 거두었던 전정을 모두 돌려 주어라 라고 하였다.


1275년 고려 충렬왕 원년 3월, 탐라에 수졸(戍卒 ; 수비병사를 관리하는 장수. 수자리)이 적어서 사람을 모집하여 작(爵)을 주어 보냈다.


같은 해 6월, 원(元)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탐라의 적당(賊黨)으로서 주(州)와 현縣)에 도망하여 숨은 자들을 용서하여 주었다.


같은 해 가을 7월, 군기조성도감(軍器造成都監)과 제주도루인물추고색(濟州逃漏人物推考色)을 설치하였다. 부병(府兵) 4령(領)을 보내어 제주에서 수자리로 살게 하였다.


1276년 고려 충렬왕 2년 윤월(閏月), 원(元)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回回 ; 회회사람) 아실미리아(阿室迷里兒)를 보내와서, 주(珠 ; 진주. 구슬)를 탐라에서 채취하였다. 같은 해 4월, 탐라의 성주(星主)가 와서 조회하니, 명하여 조정 신하 4품(四品) 아래에 서열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 임유간(林惟幹)이 주(珠)를 탐라에서 채취하다가 얻지 못하자, 이에 민소(民所 ; 민간)에서 간직한 것 백여매(百餘枚 ; 개)를 취하여 가지고 원(元)나라로 돌아갔다.

 

같은 해 8월,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상주(尙州), 청주(淸州), 해양(海陽)은 진도(珍島) 적괴(賊魁)의 향(鄕 ; 고향)이니, 주(州), 현(縣)의 칭호를 강하하여야 할 것이며, 적(賊)을 따라 탐라로 들어갔던 자(者)는 금고(禁錮)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임금은 금고하는 것만을 허락하였다.


원(元)나라에서 탑랄적(塔剌赤)을 보내어, 탐라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삼고, 말 160필(百六十匹)을 가지고 와서 기르게 하였다.


다음호에 ‘탐라(제주)의… ③’가 이어집니다.

 

 

 

▲ ©TIN 뉴스

 

 

 

 

박원호 TINNEWS 논설위원
(재)섬유패션정책연구원 사무국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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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12 [14:37]  최종편집: ⓒ 코리아패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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