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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①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9
 
KoreaFashionNews 기사입력  2016/11/28 [11:23]

 

▲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 - 1750년(영조 26년)경에 제작한 전국 군현지도첩 ‘해동지도’ 제7책 중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로서, ‘해동지도’에는 두 종의 제주도 지도가 실려 있다. 지도 앞 면에 기록된 주기(註記)에 의하면, ‘해동지도’를 제작할 당시 제주목에는 목판으로 간행한 인본(印本) 2종이 있어서, 두 종의 지도를 모두 수록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이 지도는 당시 제주읍에 보관하던 목판본 지도 중 한 벌을 모사한 것이다. 지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1709년(숙종 35년)에 간행된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를 모사한 지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로 모사한 것이 아니고, 지도의 상하에 있던 설명을 제외하고, 채색을 적절히 가미하였다. 이에 따라 원본인 흑백의 목판본 지도에 비하여 보는 사람이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운 지도로 변화되었다. ● 크 기 : 30.5cm×47cm (8책) ● 제작시기 : 1750년경 ● 소 장 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TIN 뉴스     © KoreaFashionNews

 

 

탐라(제주)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 고대 왕국인 ‘탐라국(제주)’에 대한 역사탐색 =

 

<제주(濟州)의 옛날 이름은 고대왕국으로 알려지고 있는 탐라(耽羅)를 비롯하여, 탁라(乇羅), 탐모라(耽牟羅), 섭라(涉羅), 호주(胡州),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영주(瀛洲) 등으로 불리운 도(島 ; 섬)를 일컫는다.

 

◎ 삼국사기에 수록된 탐라(제주)의 역사와 그 풍속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476년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 여름 4월, 탐라(耽羅 ; 제주도)에서 방물(方物 ; 토산물)을 바쳐오자 임금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恩率)로 임명하였다.

 

498년 백제 동성왕(東城王) 20년 8월, 임금이 탐라에서 공부(貢賦 ;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 나라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

 

589년 백제 위덕왕 36년,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하였다. 전선(戰船) 1척이 탐모라국(耽牟羅國 ; 제주도)으로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게 되어 국계(國界 ; 국경)를 통과할 때, 임금이 물자를 풍성하게 주어 귀국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 진(陳)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 수(隋)나라 고조가 이를 훌륭히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662년 신라 문무왕(文武王) 2년, 탐라국주(耽羅國主)인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찾아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武德 ; 당나라 연호. 618-626년) 이래로 백제(백제 무왕 시기)의 속국이었기에 좌평을 관직의 호칭으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屬國)이 되었다.

 

663년 신라 문무왕 3년 8월,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 등이 육군을 거느리고 진격하고, 당(唐)나라 장수 유인궤와 별장 두상(杜爽),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양선(粮船)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白江)으로 들어가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백강 입구에서 왜병(倭兵)을 만나 4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는 그들의 배 400척을 모두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았으며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으며, 백제의 군사도 크게 패하였다. 백제 부여풍이 몸을 빼내 달아나자 그의 보검(寶劍)을 노획하였다.

 

그러자 위왕자(僞王子)인 부여충승(扶餘忠勝), 부여충지(扶餘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의 병사, 탐라(耽羅) 사신 등을 거느리고 나와 한꺼번에 모두 항복하였다.

 

▲ 금동제허리띠장식/허리띠장식(통일신라시대) - 허리띠 장식은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의 표면을 장식하거나 매다는 장식을 말한다. 고대사회에서의 허리띠 장식은 권위와 신분의 상징물이었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간단한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실용적으로 변하였다. 해안가 언덕에 위치한 제주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발견된 금동허리띠 꾸미개는 현재까지 제주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예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것으로 특정한 목적, 즉 의례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반도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네모 모양의 꾸미개는 위판과 아래 판을 4개의 작은 못으로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위판에 인동 당초무늬를 정교하게 돋을새김 하였다. <출처 - 국립제주박물관>     © TIN 뉴스

 

665년 신라 문무왕 5년 가을 8월, 임금이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맺었다.

 

당(唐)나라 유인궤도 우리 신라의 사신인 백제와 탐라(耽羅), 왜인(倭人) 등 4국(四國)과 함께 바다 뱃길을 통해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에 모여서 다 함께 제사에 참석하였다.

 

679년 신라 문무왕 19년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耽羅國)을 략(略 ; 경략)하였다.

 

801년 신라 애장왕(哀莊王) 2년 겨울 10월, 탐라국(耽羅國)에서 사신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 삼국유사에 수록된 탐라(제주)의 역사와 그 풍속

 

삼국유사 권제3 탑상(三國遺事 卷第三 塔像)편에 의하면, 또 해동(海東 ;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인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신라 제27대는 여왕(女王 ; 선덕여왕. 632-647년)이 주(主 ; 임금)가 되었다. 비록 도(道)는 있지만, 위(威 ; 위엄)가 없어서 9한(九韓 ; 9나라)이 자주 침로(侵勞 ;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龍宮)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第一層)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 탐라. 제주),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 계단.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 

 

◎ 고려사절요에 수록된 탐라(제주)의 역사와 그 풍속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925년 고려 태조 8년 11월, 탐라(耽羅)에서 방물(方物 ; 토산물)을 공(貢 ; 조공)하였다.

 

938년 고려 태조 21년 겨울 12월, 탐라국(耽羅國)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조회하니, 성주(星主) 왕자의 작(爵)을 내려 주었다.

 

◎ 탐라(耽羅) 바다에 용암이 솟고, 와석(瓦石)이 생기다

 

1002년 고려 목종 5년 6월, 탐라(耽羅)의 산(山)에서 4공(四孔 ; 4구멍)이 열리고, 적수(赤水 ; 빨간 빛깔의 물)이 5일동안 용출(湧出 ; 솟아나오다)하다가 그쳤는데, 그 물이 나와서는 모두가 와석(瓦石 ; 기와 같은 까만 돌)이 되었다.

1007년 고려 목종 10년, 탐라(耽羅)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서산(瑞山 ; 상서로운 산)이 해중(海中 ; 바다 가운데)에서 갑자기 용출(湧出 ; 솟아나오다)하였습니다”라고 하자, 대학박사(大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보도록 하였다.

 

탐라 사람이 말하기를, “산(山)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는 운무(雲霧 ;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하고, 땅이 움직여 뢰(雷 ; 우레. 천둥) 같은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모두 7주야(七晝夜 ; 7일간의 밤낮)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제(霽 ; 비 구름과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산고(山高 ; 산의 높이)는 100여장(百餘丈 ; 자)이나 되고, 그 주위(周圍 ; 둘레)는 40여리(四十餘里)나 되었습니다. 그곳에 초목(草木 ; 풀과 나무)은 없고, 연기(煙氣)가 그 산 위쪽을 멱(冪 ; 뒤덮다)하였습니다. 이를 바라보면 마치 석류황(石硫黃)과 같아서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공지가 몸소 그 산 밑에 까지 가서 그 형상을 도(圖 ; 그림)로 그려서 임금에게 올렸다.

 

1011년 고려 현종 2년 8월, 탐라(耽羅)에서 주(州), 군(郡)의 예(例)에 따라, 주기(朱記 ; 나라에서 빨간 글씨로 기록하게 하는 표식)를 내려주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1012년 고려 현종 3년 8월, 탐라가 대선(大船 ; 큰 배) 2소(二艘 ; 2척)를 보내왔다.

 

1021년 고려 현종 12년 가을 7월, 탐라가 방물(方物 ; 토산물)을 보내왔다.

 

1022년 고려 현종 13년 2월, 탐라가 토물(土物 ; 토산물)을 보내왔다.

 

1024년 고려 현종 15년 7월, 탐라의 추장(酋長) 주물(周物)과 그의 아들 고몰(高沒)을 모두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과 상호군(上護軍)으로 삼았다.

 

1027년 고려 현종 18년 6월, 탐라가 방물(方物 ; 토산물)을 보내왔다.

1029년 고려 현종 20년 6월, 탐라의 세자(世子) 고오로(孤烏弩)가 래조(來朝)하니 유격장군(游擊將軍)으로 임명하고, 포(袍 ; 도포) 1습(一襲 ;1벌)을 내려주었다. 같은 해 가을 7월, 탐라가 방물(方物 ; 토산물)을 보내왔다.

 

탐라 백성 정일(貞一) 등이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다. 이전에 정일 등 21명이 항해하는 도중에 바람에 밀리어 동남(東南)쪽의 원도(遠島 ; 먼 섬) 끝에 이르렀다. 그 섬 사람들은 몸이 장대(長大)하고 온몸에 모(毛 ; 털)이 나서 덮고있으며, 어언(語言 ; 언어. 말)이 달랐다.

 

겁류(劫留 ; 억류)된 지 7개월 만에 정일 등 7명이 소선(小船 ; 작은 배)을 훔쳐 타고, 동북(東北)쪽에 있는 일본(日本) 나사부(那沙府 ; 장기)에 이러르고, 그제서야 살아서 돌아오게 되었다.

 

1030년 고려 현종 21년 9월, 탐라가 방물(方物 ; 토산물)을 보내왔다.

 

1034년 고려 덕종 3년 11월, 고려 임금이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여 백관(百官)들에게 포(酺 ; 술과 음식이 있는 잔치. 연회)를 베풀었다.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그 익일(翌日 ; 이튿날)에도 크게 팔관회를 열고 또 포(酺)를 베풀었으며, 임금이 악(樂 ; 음악)을 관람하니, 안팎에서 표문을 올려 진하(陳賀 ; 경하)하였다.

 

▲ 법화사 터에서 나온 유물(고려시대) -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지만 제주에서 불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서귀포시에 위치한 법화사 터에서는 1279년에 절이 다시 지어졌다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초기 절에 속한 노비가 280명에 이를 만큼 큰 절이었던 법화사는 고려시대부터 제주를 대표하는 오래된 절이었던 것이다. 발굴 조사 결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와 더불어 중국 청자, 용무늬 암막새, 봉황무늬 수막새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용무늬 암막새는 중국 원의 궁궐터나 주요 건물지에서 발견되는 막새와 모양이나 무늬가 비슷한데, 이는 원과 관련된 중요한 건물이 법화사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처 - 국립제주박물관> © TIN 뉴스

 

이때 송(宋)나라 상인과 동서번(東西蕃 ; 동번과 서번)과 탐라(耽羅)가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치니, 그들에게 앉아서 예(禮 ; 예식. 행사)를 보게 해 주었는데, 이후로는 이것이 상(常 ; 상례. 일정한 절차)이 되었다. 1043년 고려 정종 9년 12월, 탁라국(乇羅國) 성주(星主) 유격장군(游擊將軍) 가리(加利)가 아뢰기를, “왕자(王子) 두라(豆羅)가 근일에 죽었으니, 칭호를 그대로 왕자라 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고는 방물(方物 ; 토산물)을 바쳤다. 탁라는 바로 탐라(耽羅)이다.

 

1049년 고려 문종 3년 겨울 11월, 탐라국(耽羅國) 진위교위(振威校尉) 부을잉(夫乙仍) 등 77명과 북여진(北女眞) 수령(首領) 부거(夫擧) 등 20명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쳤다.

 

1054년 고려 문종 8년 겨울 5월, 탐라가 사신을 보내 태자를 책립(冊立)한 데 대해 하례하였다.

 

1057년 고려 문종 11년 봄 정월, 고유(高維)를 우습유(右拾遺)로 삼았는데, 중서성(中書省)이 아뢰기를, “유계(維系 ; 유의 가계)는 탐라(耽羅) 출신이니, 간관(諫官)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다면 다른 관(官 ; 관직)을 제수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삼성혈(三姓穴)은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로 고·양·부 三神人이 湧出하여 수렵생활로 皮衣肉食하다가 오곡육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의 삼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는 地神族說 신화가 깃든 곳이다. © TIN 뉴스

 

1058년 고려 문종 12년 8월, 임금이 탐라(耽羅)와 영암(靈巖)에서 벌재(伐材 ; 목재를 벌채하다)하여 대선(大船 ; 큰 배)을 만들어 송(宋)나라와 장통(將通 ; 통하다)하려 하니,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이 말하기를, “국가(國家)가 북조(北朝 ; 계단. 거란)와 수호한 뒤로는 국경에 급한 변이 없고, 백성이 생활을 편안히 즐기니, 이것으로써 방(邦 ; 나라)을 보전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계단(契丹 ; 거란)이 우리를 죄서(罪書 ; 힐책한 글)에 일컫기를, 동(東)쪽으로는 여진(女眞)과 결구(結構 ; 결탁)하고, 서쪽으로는 송국(宋國 ; 송나라)과 왕래(往來)하니, 이것은 어떤 음모를 하려는 것인가 라고 하였고, 또 상서(尙書) 유삼(柳參)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동경(東京 ; 거란의 서울) 유수留守)가 남조(南朝 ; 송나라)와 사신 왕래한 일을 물으면서 의심하고 시기하는 듯하였으니, 만약 이번에 송(宋)나라와 통하려고 하는 이 일이 설(泄 ; 누설)되면 반드시 흔극(釁隙 ; 틈. 불화)이 생길 것입니다. 또 탐라는 땅이 척(瘠 ; 척박. 메마르다)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해산(海產 ; 해산물)을 목도(木道 ; 배에 싣고 나가 팔아서 생계를 경기(經紀 ; 꾸리다. 살다)하는데, 왕년(往年 ; 작년) 가을에도 목재를 벌채하여, 바다를 건너오고, 새로이 불사(佛寺 ; 절)를 창건하느라고 노폐(勞弊 ; 노고. 수고)가 이미 많았으니, 이제 또 거듭 괴롭게 하면, 다른 변이라도 생길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상박(商舶 ; 장삿배)이 연이어 내왕하여서 진보(珍寶 ;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中國)과 교통하여도 실제로는 소자(所資 ; 얻는 이익.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계단(契丹 ;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지금 송조(宋朝 ; 송나라)와 통사(通使 ; 사신의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그에 따랐다.

 

▲ 탐라국 시조 고을라왕 영정瀛洲(영주) 君長(군장)으로서 천여세를 살았다. 한라산 북쪽에 있는 모흥혈에서 삼신인이 솟아났는데, 첫째 분은 髙乙那(고을나)요, 다음 분은 良乙那(양을나)요, 셋째 분은 夫乙那(부을나)이시다. 세분은 돌을 세우고 활을 쏘아 살 자리를 택하고 북두칠성을 우러러보아 三徒里(삼도리)로 나누어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탁라라 하였다. 영주지에 의하면 구백년 뒤에 이르러 온 나라 인심이 髙氏(고씨)에게 돌아와서 고씨로 임금을 삼았다. (출처 - 제주고씨 홈페이지) © TIN 뉴스

 

1062년 고려 문종 16년 2월, 탐라의 고협(高叶) 등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쳤다. 같은 해 겨울 10월, 탐라(耽羅) 성주(星主) 고일(高逸)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쳤다.

 

1068년 고려 문종 22년 2월, 탐라 성주 유격장군(游擊將軍) 가야잉(加也仍)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쳤다.

 

1073년 고려 문종 27년 7월,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가 아뢰기를, “일본국(日本國) 사람 왕칙정(王則貞), 송영년(松永年) 등 42명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진상하기를 청하고, 일기도(壹岐島) 구당관(勾當官)은 등정(藤井), 안국(安國) 등 33명을 보내어 역시 토물(土物 ; 토산물) 바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통제하여 해도(海道 ; 바닷길)로 경(京 ; 서울)에 오도록 하였다.

 

▲ 연혼포(延婚浦 : 속칭 황로알) - 삼신인(三神人)이 수렵생활(狩獵生活)을 하면서 피의육식(皮衣肉食) 하다가 동해(東海)의 벽랑국(碧浪國)에서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가축(家畜)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하였던 곳이다. © TIN 뉴스

 

1077년 고려 문종 31년 12월, 탐라가 방물(方物 ; 토산물)을 바쳤다.

 

1078년 고려 문종 32년 9월, 일본국(日本國)이 표풍(飄風 ; 폭풍에 떠내려가다)한 탐라 백성 고려(高礪) 등 18명을 돌려보냈다.

 

1092년 고려 선종 9년 2월, 탐라(耽羅) 성주(星主) 의인(懿仁)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치므로, 정원장군(定遠將軍)의 관직을 주고 의대(衣帶)를 하사하였다.

 

1095년 고려 헌종 원년 7월, 탁라(乇羅 ; 탐라)에서 고물(高勿) 등 80명이 와서 토물(土物 ; 토산물)을 바쳤다.

 

1096년 고려 숙종 원년 9월, 탁라(乇羅 ; 탐라) 성주(星主)가 사람을 보내와서 임금의 즉위(卽位)를 축하하였다.

 

1101년 고려 숙종 6년 10월, 탁라(乇羅 ; 탐라) 성주(星主) 배융부위(陪戎副尉) 구대(具代)를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임명하였다. 

 

▲ 사람이 살지 않던 아주 아득한 옛날,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이들은 모흥굴, 지금의 삼성혈에서 솟아났는데, 맏이를 고을나, 그 다음을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그들은 용모가 의젓하고 기품과 도량이 넉넉하고 활달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가죽옷을 입고 육식을 했으며 사냥을 업으로 삼았으나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고량부 삼신인이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갔다가 섬 동쪽 바닷가에 자줏빛 안개에 싸인 채 떠내려온 나무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산에서 내려와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새 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관대를 갖추고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옥함을 지키고 있었다. 옥함 안에는 푸른 옷을 입고 나이 15~16세 돼 보이는 처녀가 셋 있었다. 옥함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도 있었다. 사자는 고개를 두 번 숙여 절하며 말했다.“저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저희 임금님께서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 고량부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는지라 저에게 세 공주님을 모시고 가라고 명하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마땅히 혼례를 치르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삼신인은 “이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 세 사람에게 내린 것”이라 하며 기뻐했다. 사자는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삼신인은 곧 깨끗한 ‘희생’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하고 혼례를 올려 ‘흰죽’이라는 굴에서 살았다. 사자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오를 때 생긴 말의 발자국이 지금도 남았는데, 이곳이 온평리 바닷가 ‘황루알’이라는 곳이다. 또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은 ‘혼인지’라 불렀다. 혼인하여 동굴에서 살던 삼신인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샘물이 맑고 비옥한 땅을 구한 뒤 활을 쏘아 화살이 가는 방향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고을나가 차지한 곳을 일도, 양을나는 이도, 부을나는 삼도라 했다. 지금의 제주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다.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을 ‘활쏜디왓’이라 하는데,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지방기념물 ‘삼사석’(三射石)이 그곳이다. 땅을 나누어 가진 뒤 오곡의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었으며, 가축을 기르니 날로 풍요를 얻어 마침내 인간 세상 ‘탐라국’을 이루게 되었다. (박찬식 ‘삼신인과 혼인한 벽랑국 세공주’ 중에서)  사진은 고량부 삼신인이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목욕했다는 혼인지  © TIN 뉴스

 

◎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하다

 

1105년 고려 숙종 10년,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으며, 고려 의종(毅宗 ; 1146-1170년) 때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다.

 

1202년 고려 신종 5년 겨울 10월, 탐라(耽羅)가 반(叛 ; 반역)을 일으킴으로 인해 소부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낭장(中郞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탐라안무사(耽羅安撫使) 장윤문(張允文), 이당적(李唐績) 등이 적(賊)의 괴(魁 ; 괴수. 우두머리) 번석(煩石)과 번수(煩守) 등이 모두 복주(伏誅 ; 목을 베다. 처형)되었다고 아뢰었다.

 

1259년 고려 고종 46년 겨울 10, 제주(濟州)의 구속(舊俗 ; 옛날 풍속)에 무릇 남자가 15세 이상이 되면 해마다 두(豆 ; 콩) 1곡(一斛)을 세공(歲貢)으로 바치고, 아리(衙吏 ; 관아의 관리. 벼슬아치) 수백인(數百人 ; 명)은 해마다 각각 말 1올(一兀 ;1필)을 세공(歲貢)으로 바쳤다.

 

부사(副使)와 판관(判官)은 이를 받아서 나누어 가지니, 이 때문에 이들 재주자(宰州者 ; 고을을 맡은 자)는 비록 가난한 자라도 모두가 부자가 되었다.

 

김지석(金之錫)은 부사가 되어 곧 콩을 바치는 것을 면제받고, 염리(廉吏 ; 청렴한 벼슬아치) 10명을 뽑아서 아리(衙吏)에 충당하고, 또 말을 바치는 것을 없애니, 정사가 청렴하고 맑아져서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기꺼이 잘 복종하였다.

▲ 화폐/화천/동경(철기시대/탐라시대) - 주변지역과 교류가 활발하였던 제주는 한반도 남해안지역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지역을 점차 확대하여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지와도 교역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많은 국제적인 문물이 들어왔다. 제주 산지항에서 출토된 오수전, 화천, 대천오십, 화포 등 중국 동전과 본뜬거울은 대표적인 교류의 증거이다. 오수전은 중국한 무제때 처음 만든 동전으로, 중국에서도 오랜 기간 사용되었으며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본뜬 거울은 많이 부식되어 므늬를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가운데 꼭지를 중심으로 연이은 원무늬와 바깥 부분에 빗살무늬를 일부 볼 수 있다. 작은 거울은 제사 등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국립제주박물관>     © TIN 뉴스

 

1260년 고려 원종 원년 봄 정월, 태손(太孫)이 조순(趙珣)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최온(崔昷)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김전(金佺), 박성재(朴成梓)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나득황(羅得璜)을 제주부사(濟州副使)로 삼았다.

 

이에 앞서, 송소(宋佋)가 제주부사로 있다가 장죄(贓罪)를 범하여 파면당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주(濟州)가 지난날에는 소도(小盜 ; 작은 도둑. 송소)을 치렀는데, 이번에는 대적(大賊 ; 큰 도둑. 나득황)을 만났다”라고 하였다.

 

또 천문(天文)을 알기 때문에 대학박사(大學博士)가 된 자가 있고, 손으로 호(虎 ; 범)을 잡았기 때문에 임금의 시어의(侍御醫)가 된 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조(嘲 ; 조롱. 조소)하기를, 점성대학박(占星大學博 ; 별을 점치면 태학박사요), 착호시어의(捉虎侍御醫 ; 범을 잡면 시어의다)라고 하였다.

 

같은 해 2월, 제주부사 나득황으로 하여금 방호사(防護使)를 겸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제주는 해외(海外 ; 바다 밖)에 있는 신진(臣鎭))이나 송상(宋商 ; 송나라 상인), 도왜(島倭 ; 섬사람 왜인) 등과 무시(無時 ; 시도때도 없이)로 왕래(往來)함으로, 마땅히 특별히 방호별감(防護別監)을 보내어 비상(非常) 사태를 예방하여야 하나, 따로 또 방호별감을 둘 수는 없다 라고 하고는, 드디어 나득황으로 겸하게 하였다.

 

같은 때에, 김수제(金守磾)와 별장(別將) 우탄(于綻)이 함께 체발(剃髮 ; 머리를 빡빡 깎다)하고 몽고 장군 야속달(也束達)이 주둔한 곳에 있었는데, 참소하기를, “고려가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주로 옮길 것이다. 지금 다시 구경(舊京 ; 옛날 서울)에 도읍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라고 하니, 야속달이 그 말을 믿었다.

 

▲ 동자석(조선시대) - 제주의 나지막한 언덕이나 밭 한가운데 마련된 무덤에는 예로부터 동자석이 세워졌다. 무덤을 향해 서기도 하고 옆으로 비껴 마주서기도 하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대신해서 무덤에 술을 올리는 듯 한 쪽 동자는 병을 들고 반대쪽 동자는 술잔을 들고 있기도 한다. 무덤에 바칠 꽃을 들고 있기도 하고, 부채,학,표주박, 꽃봉오리 등 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두 손 모아 공손히 받들고 있다. 두 손 모아 창을 들고 있는 듯한 이 동자상은 수호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단순하게 표현된 둥근 얼굴에 상반신만 중시한 듯이 팔과 손, 지물만 간단하게 조각된 모습에서 자연스러우면서 단순하고, 소박한 가운데 명료한 제주 특유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출처 - 국립제주박물관>     © TIN 뉴스

 

고려 태자가 동쪽으로 돌아올 때에 야속달이 주둔한 곳에 이르니, 야속달이 수제로 하여금 태자와 대질시키려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하여 반인(叛人 ; 반역한 사람)의 말을 믿는가. 내가 차라리 머리를 깎고 여기서 피구(被拘 ; 구류)를 당할지언정 어찌 반역한 사람과 대질하랴”라고 하였다.

실제로 야속달은 추밀원사(樞密院使) 김보정(金寶鼎) 등 100명을 구류(拘留)하였다.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육자양(陸子襄)이 또한 몽고(蒙古)에 투항하였다. 우정(于琔), 자양(子襄)의 아비와 그 형제를 가두었다.

 

같은 해 6월, 제주(濟州)에서 말을 바치니 4품(四品) 이상(以上)에게 나누어 주었다.

 

1266년 고려 원종 7년 11월, 제주성주(濟州星主)가 와서 뵈니, 정언(正言) 현석(玄錫)을 보내어 성주를 데리고 몽고(蒙古)에 가게 했다.

 

1268년 고려 원종 9년 10월, 몽고(蒙古)가 명위장군도통령(明威將軍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무덕장군 통령(武德將軍統領) 왕국창(王國昌), 무략장군부통령(武略將軍副統領) 유걸(劉傑) 등을 보내어 군액(軍額 ; 군사 수효)과 전함(戰艦)을 사열하고, 이어서 일본(日本)으로 가는 수도(水道 ; 물길))에 잇는 흑산도(黑山島)도 시찰하였다.

 

또 탐라(耽羅)로 하여금 따로 선(船 ; 배) 100소(百艘 ; 척)를 만들게 하였다. 임금이 낭장(郞將) 박신보(朴臣甫),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우천석(禹天錫)에게 국창(國昌) 유걸(劉傑) 등을 따라가서 흑산도를 시찰하게 하였다.

 

다음호에 ‘탐라(제주)의… ②’가 이어집니다.

 

 

▲ ©TIN 뉴스

 

 

 

 

박원호TINNEWS

영남지사장(논설위원 겸직)

前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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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28 [11:23]  최종편집: ⓒ 코리아패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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