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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⑤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8
 
KoreaFashionNews 기사입력  2016/11/28 [11:17]

 

▲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 TIN 뉴스     © KoreaFashionNews

 

 

◈ 삼국사기에 수록된 발해의 역사와 그 풍속

 

◎ 해동역사에 수록된 발해의 역사와 그 풍속

 

1117년 요(遼)나라 천경 7년 정월에, 여진의 군사가 춘주(春州)를 공격하니 발해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요사)

 

1116년 금(金)나라 태조(太祖) 수국(收國) 2년 4월 을축에, 알로(斡魯)에게 제군(諸軍)을 모두 거느리고 도모(闍母), 포찰(蒲察), 적고내(迪古乃) 등과 함께 가서 함주로도통(咸州路都統) 알로고(斡魯古)와 군사를 합해 고영창을 치게 하였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고영창이 군사들을 위협하고 꾀어서 한쪽 방면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허술한 틈새를 파고들어 차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원대한 계책이 있는 것이 아니니, 고영창은 곧바로 망할 것이다. 동경(東京)에 있는 발해 사람들은 나에게 덕을 입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쉽사리 회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발해 사람들이 우리에게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나아가서 토벌하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는 말라”라고 하였다.

 

고영창은 발해 사람으로서 요(遼)나라에 벼슬해 비장(裨將)이 되어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동경의 팔담구(八甔口)에 주둔해 있었다. 고영창은 요(遼)나라의 정사가 날로 문란해지고, 태조가 군사를 일으키자 요(遼)나라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동경에 있는 한인(漢人)들이 발해 사람들과 원한을 맺어 발해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이에 고영창이 발해 사람들을 꾀어 군사들과 함께 동경에 들어가서 동경부를 차지하니,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원근에서 이에 호응하여 군사가 8천명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고영창이 드디어 왕호를 참칭하면서 융기(隆基)로 연호를 고쳤다. 요나라 사람들이 고영창을 토벌하였으나, 오래도록 토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영창이 달불야(撻不野), 표합(杓合) 등을 시켜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둘이 함께 힘을 합하여 요(遼)나라를 탈취하였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가 호사보(胡沙補)로 하여금 가서 유시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나에게 항복하면 임금의 관작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이어 요(遼)나라에 편입된 여진족 호돌고(胡突古)를 보내게 하였다.

 

그러자 고영창이 달불야로 하여금 호사보, 호돌고 등과 함께 가게 하였는데, 고영창이 올린 표문(表文)의 내용이 공손하지 않았으며, 또 포로로 잡아간 발해 사람들을 돌려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태조가 호돌고를 머무르게 하고 보내지 않으면서 대약사노(大藥師奴)를 파견하여 달불야와 함께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  발해 염주성(크라스키노 평지성), 사진:서울시 제공    © TIN 뉴스

 

같은 해 5월에 알로가 심주(瀋州)로 진격해 함락시켰다. 이에 고영창이 크게 두려워해서 가노(家奴)인 탁라(鐸刺)를 시켜 금인(金印) 하나와 은패(銀牌) 50개를 보내면서 명호(名號)를 버리고 번국(藩國)을 칭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알로가 호사보(胡沙補), 살팔(撒八)로 하여금 통보하게 하였다. 이때 마침 발해 사람 고정(高禎)이 항복해 와서 말하기를, “고영창은 진심으로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늦추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알로가 진격하니, 고영창이 드디어 호사보 등을 죽인 다음 군사들을 거느리고 항거하였다.

 

옥리활수(沃里活水)에서 두 군사가 만났는데, 고영창의 군사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다. 알로가 드디어 북쪽으로 가서 동경성 아래에 이르렀다. 다음 날에 고영창이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싸웠는데, 다시 고영창이 크게 패하고는 드디어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장송도(長松島)로 도망쳤다.

 

이 보다 앞서 태조가 영강주(寧江州)를 함락하였을 때 거기에 있던 동경(東京)에 있는 발해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들이 가끔 중간에서 도망치자, 여러 장수들이 발해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이미 적을 이겨서 성을 함락했으면 되었지, 어찌 많이 죽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동경 사람 은승노(恩勝奴), 선가(仙哥) 등이 고영창의 처자식을 잡은 뒤 성을 들어서 항복하였는데, 이들은 바로 영강부에서 석방하였던 동경 발해 사람들이었다.

 

▲  2014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러시아 연해주 문물전’에서 선보인 발해 유물 중 청동 말 탄 인물상(체르냐티노 5 고분군)  사진 : 서울시 제공  © TIN 뉴스

 

얼마 뒤에 달불야가 고영창 및 탁라(鐸刺)를 잡아 태조에게 바치니, 모두 처형하였다. 이에 요의 남로(南路)에 있던 여진족과 동경의 주현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요(遼)나라 법을 없애고 세금을 줄여 주었으며, 맹안(猛安)과 모극(謀克)을 설치하기를 한결같이 본조(本朝)의 규례와 같이 하였다. (금사金史)

 

발해국은 연경(燕京)이나 여진이 도읍한 곳에서 모두 1천5백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아울렀다. 임금의 성씨는 대씨(大氏)이며, 대성(大姓 ; 큰 성씨)으로는 고씨(高氏), 장씨(張氏), 두씨(竇氏), 오씨(烏氏), 이씨(李氏) 등 몇개에 불과하다.

 

성(姓)씨가 없는 부곡(部曲)과 노비들은 모두 임금의 성씨를 따른다. 부인들은 모두 투기가 심하다. 이에 다른 성씨와 서로 결연을 맺어 10자매(姊妹)가 되어 번갈아 가면서 남편들을 기찰하여, 측실(側室)을 두거나 유녀(游女)들과 놀지 못하게 하며, 그런 사실이 있다고 들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독살한다.

 

만약 어떤 남편이 이를 범하였는데도 그 아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경우에는 나머지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 욕설을 퍼붓는 등 투기하는 것을 서로 떠벌리면서 자랑한다. 이에 계단이나 여진에는 모두 여창(女娼)이 있고 남편들에게는 모두 작은 마누라나 시비(侍婢)가 있으나, 발해만은 그런 것이 없다.

 

발해의 남자들은 지모가 뛰어나며 날쌔고 용감하여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다. 그래서 “발해 사람 셋이면 범도 당해낸다”라는 말까지 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의 임금 대인선을 멸망시킨 뒤 발해의 명장(名帳) 1천여호를 연(燕)나라 지방으로 옮기고는 토지를 나누어 주고 세금을 줄여 주었으며, 왕래하여 무역하면서 시장에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이 선봉에 서게 하였다.

 

천조제(天祚帝)의 변란 때 발해의 무리들이 모여 예전에 발해의 도성이 있던 지역에서 대씨(大氏) 성씨를 가진 자를 세워 임금이 되게 하였는데, 금(金)나라 사람들이 이를 토벌하였다. 그때 금(金)나라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씨(高氏) 성씨를 가진 발해의 귀족이 가족을 팽개치고 금(金)나라에 가서 항복한 다음, 발해의 허실에 대해 모두 말하였다.

 

▲ 2014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러시아 연해주 문물전’에서 선보인 발해 유물 중 니브힌인의 축제용품, 사진 : 서울시 제공     © TIN 뉴스

 

성(城)이 함락된 뒤 계단에서 연(燕)나라 지방으로 옮긴 발해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나 5천여호나 되었으며, 군사가 3만명이나 되었다. 이에 금(金)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는데, 매년 수백호(가구)를 옮기는 데 불과하여 신유년에 이르러서야 모두 옮겨 가게 하니, 발해 사람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산 지가 200년이 넘어 왕왕 집에 정원을 만들고는 모란(牡丹)을 심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2, 300그루나 되었으며, 어떤 모란은 수십 줄기가 빽빽하게 자라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연(燕)나라 지방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정원들을 겨우 몇만 냥이나 혹은 5천냥에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떠나갔다. 옛날 발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계단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옛날에 동경(東京)이 있었던 지역에 유수(留守)를 두었다. 소주(蘇州)와 부주(扶州) 등이 있었는데, 소주는 중국의 등주(登州)나 청주(靑州)와 아주 가깝게 서로 마주하여 있어서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개와 닭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송막기문(松漠紀聞)

 

살펴보건대, 926년 요(遼)나라 천현(天顯) 원년은, 바로 후당 천성(天成) 원년이다. 홀한성(忽汗城)을 이미 격파하고 대인선(大諲譔)을 임황(臨潢)으로 옮겼으며, 대광현(大光顯)이 고려(高麗)로 달아났다. 그러나 요사(遼史)에는, “태조가 영웅의 도량이 있어서 발해를 멸하고서도 그 족장(族帳)을 요련(遙輦)의 다음에 두었다”라고 하였으며, 요(遼)나라의 동북로관압사(東北路管押司)에 발해부(渤海部)와 서북발해부가 있다고 하였다.

 

요(遼)나라 태종 때에는 발해 사람들을 한결같이 한(漢)나라 법에 의거하여 다스리고 그 풍속을 고친 것이 없었으며, 성종(聖宗) 통화(統和)와 개태(開泰) 연간에는 혹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혹 중국에서 군사를 보내어 친히 정벌하기도 하였다.

 

소한가노(蕭韓家奴)는 “발해, 여진, 고려가 서로 합종연횡(合從連橫)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후당(後唐)의 장흥(長興), 청태(淸泰) 연간에는 해마다 중국에 직공(職貢)을 닦아 사신이 끊이지 않았으며, 오대사에는, “주(周)나라 세종 현덕(顯德) 연간까지 발해의 사신이 항상 왔다”라고 하였으며, 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는 중국에서 염부왕(琰府王)에게 조서를 내렸고, 순화(淳化) 2년에는 발해에서 조공을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진에 명해서 공격하게 하였다.

 

▲ 발해 수도였던 상경성(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서 1930년대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화폐에는 '발해통보'와 '천통팔년(天統捌年)'이라는 명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 TIN 뉴스

 

호삼성(胡三省)은, “발해는 5대시대를 거쳐 송(宋)나라 때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비록 여러 차례 공격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들로 보면 발해가 비록 이미 망하였으나 오히려 남은 부(部)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사(宋史) 송기열전(宋琪列傳)에는, 송기가 변방의 일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奚帳)보다 더 성합니다. 지금 비록 억지로 계단(거란)을 섬기고 있지만, 모두 자신들의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데 대한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끝내는 대연림(大延琳)과 고영창(高永昌)이 서로 이어서 반란을 일으켰고, 춘주(春州)와 요주(饒州)에 있던 발해 백성들도 걸핏하면 흔란을 일으켜, 요(遼)나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반란을 일으키고 귀부하기를 멋대로 하였다. 주(周)나라 현덕 이후의 사실은 모두 대인찬이 요(遼)나라에 항복한 이후의 일이므로 지금 대충 끝에다가 기술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야율아보기가 이미 발해의 호구를 내지(內地)로 옮긴 뒤에는 발해군상온(渤海軍詳穩)과 발해군도지휘사사(渤海軍都指揮使司)를 두어 요양로(遼陽路)에 속하게 하여 이로써 고려를 제압하게 하면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징발하였다.

 

1114년 천경 4년에 여진이 영강주(寧江州)를 공격하자, 해주(海州) 자사(刺史) 고선수(高仙壽)를 파견해 발해군을 거느리고 응원하게 한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할 경우에도 유독 발해의 병마에 대해서만은, 비록 조서(詔書)를 받들더라도 반드시 위에 아뢴 다음, 위에서 대장을 파견하여 금어부(金魚符)를 가지고 와서 맞춰본 다음에야 군사를 발했다. 무릇 전투를 하면서 적과 대치했을 때에는 발해의 군사들이 항상 앞장서서 싸워 가장 강했다. (금사)

 

종간열전(宗榦列傳)에, 태조가 요(遼)나라를 정벌할 적에 종간이 먼저 출동했는데, 발해군이 앞으로 돌격해 나가자 요(遼)나라의 좌익(左翼)에 있던 제7 모극(謀克)이 조금 물러났다. 이에 드디어 요(遼)나라의 중군(中軍)을 범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 발해장사(渤海帳司)를 두었는데, 관속(官屬)으로는 발해(渤海) 재상(宰相)이다.

 

994년 통화 12년 발해달마(渤海橽馬), 1028년 태평(太平) 8년 9월에 발해 재상 나한(羅漢)에게 임시로 동경통군사(東京統軍使)를 맡게 한 것과 같은 일이 그것이다. 1029년 태평 9년에 나오는 발해태보(渤海太保) 하행미(夏行美)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발해근시상온사(渤海近侍詳穩司)가 있었다. 991년 통화 9년 발해 근시상은 고청명(高淸明)도 같은 유이다. 1019년 성종 개태 8년에는 또 동경발해 승봉관(東京渤海承奉官)을 두어 관직에는 도지압반(都知押班)이 있었다. 모두 통괄하게 하였다. 해왕(奚王) 회리보(回离保)가 참칭하였고, 또 발해추밀원(渤海樞密院)을 두었다.

 

금(金)나라 초기에 이르러서 발해의 백성들을 제압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해서 항상 이들을 불러 위로하면서 회유하였다. 태조가 국경에서 요(遼)나라 군사를 패몰시키고는 양복(梁福)과 알답라(斡答刺)로 하여금 발해 사람들을 불러 회유하게 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디 한 집안이다”라고 하였는 바, 대개 그 처음은 모두 물길(勿吉)의 7부(部)이다.

 

1116년 수국(收國) 2년에는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는 발해의 부민(府民)으로서 항복하였거나 포로로 된 자들을 죄주지 말고, 추장(酋長)은 관직에 그대로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아무 곳에나 가서 살게 하라”라고 하였다.

 

1118년 천보(天輔 ; 금나라 태조의 연호) 2년에는 발해군(渤海軍)에 8개의 맹안(猛安)을 두었으며, 이해 같은 해 7월 계미에 조서를 내리기를, “발해대가노(渤海大家奴) 등 모극(謀克)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예전에 일찍이 관량(官粮 ; 식랼)을 나누어 주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었다. 지금 이미 날짜가 오래되었는데, 얼마나 불어났는지 모르겠으니, 그 숫자를 갖추어서 아뢰라”라고 하였다.

 

또 동경로발해 만호(東京路渤海萬戶)를 두어, 금사(金史) 열전(列傳)에, 세종 때 고송(高松)을 관압동경로발해 만호(管押東京路渤海萬戶)에 충임(充任)하였다고 하였다. 서로 통섭(統攝)하게 하였다. 국가의 형세가 점차 성대해짐에 미쳐서는, 1145년 황통(皇統 ; 금나라 희종의 연호) 5년에 요동의 발해인과 한인(漢人)이 맹안과 모극을 승습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점차 병권(兵權)을 내족(內族)에게로 옮겼다. 금사(金史) 식화지(食貨志)에, 모든 한인과 발해인은 맹안과 모극에 충임하지 못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

 

1149년 9년 8월에는, 재신(宰臣)들의 의논에 따라 요양(遼陽)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연(燕)나라 지방 남쪽으로 옮기고, 그 뒤에는 또 자주 산동(山東) 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다. 신유년에 이르러서 모두 내몰았는데, 옛날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혹 계단(거란)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해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져 전해지는 바가 없게 되었다.

 

▲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에서 출토된 말 탄 인물상(靑銅騎馬人物像)   © TIN 뉴스

 

 

◈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발 역사와 그 의복풍물에 대하여

 

◎ 구당서 북적 발해

 

구당서(舊唐書) 북적(北狄) 발해말갈(渤海靺鞨)편에 의하면, 발해말갈의 대조영(大祚榮)은 본디 고려(高麗 ; 고구려)의 별종(別種 ; 갈래)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家屬 ; 가족)을 거느리고 영주(營州)로 옮겨 거주하였다. 당(唐)나라 만세통천(萬世通天 ; 696-697년) 연간에, 계단(契丹 ;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靺鞨)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각기 망명하였던 무리들을 통솔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수비하였다.

 

이진충이 죽자 칙천(則天 ; 칙천무후)이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의 여당(餘黨 ; 잔당)을 토벌하게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격파하여 머리를 베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압박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과 합쳐서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왕사(王師 ; 당나라 임금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빠져 돌아왔다. 계단과 해(奚)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무리들이 모두 돌궐(突厥)에 투항하자, 도로(道路)는 조절(阻絶 ; 단절)되었기에 칙천이 능히 토벌하지 못하게 되자, 대조영은 마침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계루(桂婁)의 옛날 땅에 의지하여 동모산(東牟山)에 자리잡고 성(城 ; 성곽)을 쌓아 거주하였다.

 

대조영은 날래고 용감하여 군사를 잘 부렸는데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유민들이 점차 그에게 돌아갔다. 당(唐)나라 성력(聖曆 ; 698-700년) 연간에, 스스로 즉위하여 진국왕(振國王)이 되고 사신을 보내 돌궐과 왕래하였다.

 

그 땅은 영주의 동쪽 2천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접해 있다. 월희말갈(越憙靺鞨)의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고 땅은 사방 2천리에 이른다. 편호(編戶 ; 편성된 가구)의 수는 10여만호로 날랜 병사가 수만명에 이른다. 풍속(風俗)은 고구려 및 계단(거란)과 같으며 자못 문자(文字)와 서기(書記 ; 기록된 책)가 있다.

 

705년 당(唐)나라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시어사 장행급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 위로하였다. 대조영이 아들을 들여보내 시중들게 하자 얼마 후 관작을 더하고 조칙을 내려 직위에 오르게 하였으나 마침 계단(거란)과 돌궐과 더불어 해마다 변경을 노략질하였기에 사신이나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711년 예종 선천 2년에, 낭장 최흔을 파견하여 가서 대조영을 책봉하여 좌효위원외대장군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에 임명하고 그가 통솔하고 잇던 곳을 그대로 홀한주(忽汗州)로 삼고 홀한주 도독을 더하여 제수하였더니 이로부터 해 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719년 당(唐)나라 개원 7년에, 대조영이 죽자 현종(玄宗)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문하여 제사를 지내고 그의 적자(其嫡子 ; 맏아들)인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무예(大武藝)에게 조칙을 내려 직위에 오르게 하고, 부친의 관작을 답습하여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이 '발해·고려실' 상설전시관을 올해 1월 새롭게 단장, 철조 아미타불 등 유물 770여점 중 230여점을 새롭게 공개했다. 발해실은 남북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실로 발해 와당, 흙으로 만든 불상 등을 볼 수 있다. 발해 왕조의 정통성, 발해의 수도·왕권·통치, 해동성국 발해와 주변 세계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발해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소개하는데 역점을 뒀다. 흙으로 구워 만든 불상(발해)   © TIN 뉴스

 

726년 당(唐)나라 개원 14년에,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니 조서를 내려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고 그대로 장사(長史)를 설치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진압(鎭押)했다. 무예(武藝)가 그의 족속에게 말하기를, “흑수(黑水)가 당가(唐家 ; 당나라)와 상통(相通)하기 위해 나의 경계를 지나가려할 때 옛날 친구인 돌궐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모두 앞서서 나에게 아뢰고 같이 갔다. 지금은 그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곧 바로 한관(漢官 ; 한나라에 관직)을 요청하니 필시 이는 당(唐)나라와 왕래하고 도모하여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며 그의 아우 대문예(大門藝) 및 구(舅 ; 장인) 임아(任雅)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흑수를 치게 하였다.

 

대문예가 일찍이 인질로서 경사(京師 ; 당나라 서울)에 왔다가 713년 당(唐)나라 개원 초년에, 환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무예에게 이르기를, “흑수가 당(唐)나라의 벼슬아치를 청하였으니, 곧 그를 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당(唐)나라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唐)나라는 사람이 많고 군사가 강하기가 우리보다 1만배(萬倍)가 되니 1조(一朝 ; 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 것은 단지 스스로 멸망으로 찾아드는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의 전성기 때에는 강병(强兵)이 30여만명이나 있어서 당(唐)나라에 항적(抗敵)하며, 붙쫓아 섬기지를 않았더니 당(唐)나라 군사가 한차례 당도함에 땅을 쓸어 버린 듯 모두 죄다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발해(渤海)의 중(衆 ; 백성. 무리)은 고구려보다 몇 배나 작으니 이로 당(唐)나라에 거슬러 배반하고자 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무예가 따르지 않았으며 문예는 병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또 다시 글을 올려 거듭 간하였다.

 

무에가 노하여 종형(從兄)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문예의 병사를 통솔하게 하고 문예를 죽이라 하니, 대문예가 마침내 그의 무리를 버리고 간도(間道 ; 사잇길)로 내달아났다. 무예가 조서를 내려 대일하를 좌효위장군으로 제수하였다. 대문예가 얼마되지 않아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대무예의 죄상을 상세히 말하고는, 청하여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상(上 ; 당나라 임금)이 은밀히 문예를 보내어 안서(安西)로 가게하고, 무예에게 답하여 이르기를, “문예는 멀리로부터 와서 붙좇아 투항하였으니 도의로서 죽이지는 못하오 지금은 내쳐서 영남(嶺南 ; 천문령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이미 보냈기에 거의 도착하였을 것이오”라고 하며 이에 그의 사신은 마문궤(馬文軌)와 홀물아(忽勿雅)는 머무르게 하고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그렇게 답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을 누설한 자가 있어서 대무예가 또 글을 올려 이르기를, “대국(大國)은 믿음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속일 수 있습니까 지금 듣건대 문예가 영남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 하니 엎드려 청하건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여버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홍려소경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 등은 벼슬아치들을 능히 감독하고 살피지 못하여 사실의 누설이 있게 되었다 하여 도수는 좌천되어 조주(曹州) 자사(刺史)가 되었으며 복은 택주(澤州) 자사가 되었다. 사자를 보내 대문예를 잠시 영남으로 향하게 하고는 이로서 그에게 답하였다.

 

▲  발해 와당   © TIN 뉴스

 

732년 당(唐)나라 개원 20년에, 대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 자사 위준(韋俊)을 공격하였다. 조서를 내려 대문예를 파견하여 유주(幽州)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고 이로 그를 토벌하게 하였으며, 게다가 태복원외경 김사란(金思蘭)에게 영을 내려 신라로 가서 병사를 일으켜 그들의 남경(南境 ; 남쪽 국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연이은 산의 험준함에 막히고, 추위에 눈의 깊이까지 1장(丈 ; 1질. 10자) 가까이 됨으로 인해 얼어 죽은 병사(兵士)가 절반을 넘자 결국에는 아무런 전공도 없이 돌아왔다.

 

대무예가 원한을 품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은밀히 사자를 동도(東都)로 보내어 자객(刺客)을 빌리어 대문예를 천진교(天津橋)의 남쪽에서 찔렀는데 문예가 그들과 대적하여 죽지는 않았다. 조서를 내려 하남부(河南府)에서 그 적(賊)들을 포획(捕獲)하여 모두 죽였다.

 

737년 당(唐)나라 개원 25년에, 대무예가 병으로 죽자 그 아들 흠무(欽茂)가 대를 이어 임금자리에 올랐다. 조서를 내려 내시 단수간(段守簡)을 파견하여 가서 흠무를 책봉하여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고, 그대로 부친을 이어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흠무가 조칙을 받들고는 그 나라 안을 크게 사면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수간(守簡)을 따라 들어가 예방하고 조공을 바쳤다.

 

이때부터 775년 당(唐)나라 대력 10년에 이르기까지, 혹은 빈번히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였으며, 혹은 한 해 걸러 이르기도 하고 혹은 한 해에 두세 번을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과 다음 해 정월에 사신을 보내 일본국(日本國)의 무녀(舞女) 11명과 방물(方物 ; 토산물)을 바쳤다. 같은 해 4월과 12월에 사신이 다시 왔다.

 

782년 당(唐)나라 건중 3년 5월과, 791년 당(唐)나라 정원 7년 정월에, 모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기에, 그들의 사신 대상정(大常靖)을 위위경동정에 제수하고, 그의 번(蕃 ; 나라)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그들의 왕자(王子) 대정한(大貞翰)이 와서 예방하고 청하기를 숙위(宿衛)에 들고자 하였다. 794년 당나라 정원 10년 정월에, 들어와서 예방한 왕자 대청윤(大淸允)을 우위장군동정으로 삼고 그 휘하 30여명에게도 관직을 차등있게 주었다.

 

795년 당(唐)나라 정원 11년 2월에, 내상시 은지섬(殷志贍)을 파견하고, 대승린(大嵩璘)을 책봉하여 발해군왕으로 삼았다. 798년 당(唐)나라 정원 14년에,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의 관작으로 더해 주고 발해국왕으로 올려 봉하였다.

 

▲ 2014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러시아 연해주 문물전’에서 선보인 석불상<크라스키노 절터 출토>  © TIN 뉴스

 

승린의 부친 흠무는, 당(唐)나라 개원(開元 ; 713-741년) 연간에 그 부친의 작위를 답습하여 군왕좌금오대장군이 되었으며, 당(唐)나라 천보(天寶 ; 741-756) 연간에는 거듭 특진하여 태자첨사빈객의 관작이 더하여 졌으며, 762년 당(唐)나라 보응(寶應) 원년에는 국왕으로 올려 봉해졌다.

 

당(唐)나라 대력(大曆 ; 766-779) 연간에 거듭하여 사공태위로 더하여 관작이 수여되었는데, 승린에 이르러서도 그 작위를 답습하게 하면서 단지 군왕 및 장군만을 제수하였을 뿐이었더니 승린이 사신을 보내 이치를 밝히므로, 그 까닭에 다시 더하여 책명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임금의 조카 대능신(大能信)으로 하여금 좌효위중랑장 및 우후(虞候) 누(婁)의 번장(蕃長)으로 삼고, 도독 여부구(茹富仇)로 우무위장군을 삼고는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805년 당(唐)나라 정원 21년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순종이 숭린의 관작에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을 더하여 주었다.

 

806년 당(唐)나라 원화 원년 10월에, 검교태위의 관작을 더하여 주었다. 같은 해 12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809년 당(唐)나라 원화 4년에, 숭린의 아들 원유(元瑜)로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을 삼고 앞서와 같이 발해국왕으로 하였다.

 

810년 당(唐)나라 원화 5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이 2번이었다.

 

812년 당(唐)나라 원화 7년에, 역시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813년 당(唐)나라 원화 8년 정월에, 원유의 아우 권지국무 언의(言義)로 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도독, 발해국왕을 삼고 내시 이중민(李重旻)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818년 당(唐)나라 원화 13년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고 또한 상중임을 아뢰었다. 같은 해 5월에 지국무 대인수(大仁秀)로 은청관롱대부 검교비서감 도독 발해국왕으로 삼았다.

 

820년 당(唐)나라 원화 15년 윤정월에, 사신을 보내와서 예방하니 대인수에게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의 관작을 더하여 주었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822년 당(唐)나라 장경 2년 정월에,  또 사신을 보내왔다.

 

824년 당(唐)나라 장경 4년 2월에, 대예(大叡)등 5명이 와서 예방하고 청하여 숙위에 들고자 하였다. 당나라 보력(寶曆 ; 825-827) 연간에 해마다 조공의 직분을 닦았다.

 

827년 당(唐)나라 대화(大和 ; 827-835) 원년과 830년 4년에 모두 사신을 보내와서 알현하였다.

 

831년 당(唐)나라 대화 5년에 대인수(大仁秀)가 죽자 권지국무 대이진으로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 도독 발해국왕을 삼았다.

 

832년 당나라 대화 6년에 왕자 대명준(大明俊) 등을 보내와서 예방하였다.

 

833년 당(唐)나라 대화 7년 정월에 동중서우평장사 고보영(高寶英)을 보내와서 책봉을 사례하고 아울러 학생(學生) 3명을 보내, 고보영을 따라와서 청하여 상도(上都)에 나아가 학문(學問)을 닦고자 하였다.

 

먼저 보낸 학생 3명은은 학업이 점차 잘 이루어짐에 청하여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같은 해 2월에 왕자(王子) 대선성(大先晟)등 여섯 사람이 와서 예방하였다.

 

당(唐)나라 개성(開成 ; 836-840) 연간 이후에도 역시 조공의 직분을 닦음이 끊이지 않았다.

 

◎ 기타 중국사서의 발해 기록

 

오대사(五代史)에 의하면, 907년 양(梁)나라 태조 개평(開平) 원년 5월에, 발해의 임금 대인선(大諲譔)이 왕자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발해는 본디 말갈(靺鞨)이라 부르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발해의 귀족은 성이 대씨로, 5대 동안이나 항상 왕래하면서 조공을 바쳤는데, 그 나라의 토산물(土産物)은 고구려와 같다. 대인선의 세차(世次), 왕이 된 해, 죽은 해 등에 대해서는 역사의 기록을 모두 잃어버렸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현주(顯州)의 포(布)이다.

 

책부원구에 의하면, 925년 발해 애왕 25년 후당 동광(同光) 3년, 발해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황명세포(黃明細布)를 조공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용주(龍州)의 주(紬)이다. 발해(渤海)에는 품(品)으로 질(秩)을 삼는데, 3질 이상은 자복(紫服)에 아홀(牙笏)과 금어(金魚)를 차고, 5질 이상은 비복(緋服)에 아홀과 은어(銀魚)를 차고, 6질과 7질은 천비의(淺緋衣)에 목홀(木笏)을 차고, 8질은 녹의(綠衣)에 목홀을 찬다.

 

문헌통고에 의하면, 발해국의 풍속은 매년 세시(歲時)에 모여서 음악을 연주한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몇 명에게 앞서 가도록 명하고, 사녀(士女)들이 그에 따라서 다시 창화(唱和)하면서 빙글빙글 도는데, 이를 답추(踏鎚)라고 부른다.

 

금사(金史)에 의하면, “태화(泰和) 초에 유사(有司)가, 태상시(太常寺)에 있는 공인(工人)의 숫자가 적으니, 발해 교방(渤海敎坊)의 악인(樂人)들에게 겸하여 음악을 익히게 해 쓰임에 대비하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승안(承安) 4년에 발해 교방의 장행(長行) 30명을 없앴다 라고 하고 있다.

이상은 발해의 악제와 악기이다. <끝>

 

 

▲ ©TIN 뉴스

 

 

 

박원호TINNEWS

영남지사장(논설위원 겸직)

前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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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28 [11:17]  최종편집: ⓒ 코리아패션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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