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가락)시대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③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7
KoreaFashionNews | 입력 : 2016/11/28 [10:30]
 ▲ 국립무용단 춤극 <가야> 중 허황후 장면 © TIN 뉴스     © KoreaFashionNews

 

 

◈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야의 역사와 그 풍속

 

◎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

 

189년 한(漢)나라 영제(靈帝) 중평 6년 기사 3월 1일, 왕후가 붕(崩 ; 세상을 떠나다)하였다. 수(壽 ;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지듯이 탄식하며. 구지(龜旨 ; 구지봉) 동북쪽 오(塢 ; 둑. 제방.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하민(下民 ;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던 혜(惠 ;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처음에 올 때 람(纜 ; 닻줄)을 내리고 건너왓던 두촌(頭村 ; 나루의 마을)을 일러 그 이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였고, 릉고(陵袴 ; 견직물 치마. 아래옷)를 벗었던 고강(高岡 ; 높은 산등성이.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였으며, 천기(茜旗 ; 빨간 빛깔의 깃발)을 달고 들어온 해애(海涯 ;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잉신(媵臣 ;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동안 각각 딸 둘을 낳았다.

 

이들 부(夫 ; 지아비. 남편)와 부(婦 ; 지어미. 아내)도 그 1~2년이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나머지 장획(臧獲 ; 남녀노비. 종)의 무리들은 가락국에 온지 7~8년이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로지 고향을 포회(抱懷 ; 그리워하며 품다. 회포)하며 슬퍼하다가 모두 수구(首丘 ; 고향 땅을 향해 머리를 두다)하고 죽었다.

 

그들이 머물렀던 사빈관(舍賓館 ; 객관)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원군(元君 ; 시조 임금)은 매일 혼자서 가(歌 ; 노래)를 부르며다가 잠에 들었으며, 참으로 많은 비탄(悲嘆 ; 슬퍼하며 탄식하다)만이 쌓여갔다.

 

2-5세(二五歲 ; 10년. 10해)가 지난, 199년 한(漢)나라 헌제(獻帝) 건안 4년 기묘에 조락(殂落 ; 임금이 세상을 떠나다)하였는데, 나이가 158세였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였으니, 왕후가 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비통(悲慟)해 하였다.

 

곧 대궐의 간방(艮方 ; 동북쪽) 평지(平地)에 빈궁(殯宮)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1장(一丈)이며, 둘레가 300보(三百步)였다. 여기서 장례를 지내고, 그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그 사자(嗣子 ; 대를 이은 아들)인 거등왕(居登王)부터 9대손(九代孫)인 구형왕(仇衡王)에 이르기까지 이 사당에 배향하였다.

 

반드시 매세(每歲 ; 매년) 맹춘(孟春 ; 정월) 3일과 7일, 중하(仲夏 ; 5월) 5일, 중추(仲秋 ; 8월)의 5일과 15일이면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로 제사을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 6가야는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고령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를 말하며 이들 고대나라들은 대부분 지금의 김해지방을 비롯한 영남지방에 위치해 있었다. 김해지방의 금관가야는 6가야 중 가장 세력이 컸던 나라였고 수로왕 이후 자그마치 491년간이나 유지 됐던 나라였다.   © TIN 뉴스

 

661년 신라(新羅) 법민왕(法敏王 ; 문무왕) 3월 모일에 이르러, 임금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원군(元君 ; 시조 임금. 가야 수로왕)의 9세손인 구형왕(仇衡王)이 당국(當國 ;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짐(朕)을 낳으셨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조 수로왕께서는 유충인(幼冲人 ; 과인)에게 있어서 15대(十五代) 시조(始祖)가 된다. 그 분이 다스렸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분을 장사지낸 묘자(廟者 ; 사당)는 아직도 상존(尙存 ; 남아 있다)하고 있으니, 종조(宗祧 ; 종묘)와 합하여서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벼슬아치를 서리(黍離 ; 멸망하여 없어지다. 옛날)의 지(址 ; 터)에 보내서, 사당에서 가까운 곳에 상상전(上上田) 30경(三十頃)을 주어 제사를 지내는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왕위전(王位田)이라고 부르고, 본래의 토지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시조 임금의 17대손인 갱세(賡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뜻을 삼가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였다.

 

매년 때가 되면 요례(醪醴 ; 흐린 술과 맑은 술)를 빚고, 병(餠 ; 떡)과 반(飯 ; 밥), 다(茶 ; 차), 과(菓 ; 과일. 과자), 서수(庶羞 ; 여러 가지 음식) 등의 제물을 갖추어서 제사를 지냈으니,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사일도 거등왕(居登王)이 정한 5일을 빠뜨리지 않았으니, 이렇게 정성스럽게 지내어서,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렀다.

 

199년 거등왕(居登王)이 임금자리에 오른 기묘년에 편방(便房 ; 뒷방. 별실)을 설치한 이후로 구형왕 말년까지 내려오면서, 330년 동안 지내는 제사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내려왔다.

 

그러나 구형왕이 나라의 임금자리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661년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 이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는 혹 거르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효성을 다하는구나!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서 다시 행하였구나!

 

신라 말기에 충지(忠至) 잡간(匝干)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金官)의 높은 성(城)을 쳐서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그런데 영규(英規) 아간(阿干)이 장군의 위세를 빌려 사당의 제사를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端午)가 되어 사당(祠堂)에 고하다가 아무 이유 없이 량(梁 ; 대들보)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그러자 성주장군이 혼자 말하기를, “다행(多幸)히 전세의 인연으로 분수에 넘치게 거룩하신 성왕(聖王)께서 다스리던 나라의 성(城)에서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내 마땅히 그 모습을 그리고 향(香)을 피우고 등(燈 ; 등불)을 밝혀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교견(鮫絹 ; 물고기 무늬가 있는 견직물) 3척(三尺 ; 자)에 그 진영(眞影 ; 얼굴 그림. 모습)을 그려서 벽(壁) 위에 모시고, 단석(旦夕 ; 아침과 저녁)으로 불을 밝혀 우러러보며 공손하게 모시었다.

 

그러길 3일째 되는 날 영정의 두 눈에서 혈루(血淚 ; 피눈물)이 흘러 땅바닥에 고였는데 거의 1두(一斗 ; 1말)나 되었다. 장군이 크게 놀라서 그 그림을 받들고 사당으로 나아가 불을 살랐다. 그리고 그 즉시 수로왕의 직계손인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하였다.

 

“어제도 이런 불상사(不祥事 ; 좋지 못한 일)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거듭될 수 있는가? 이것은 필시 사당의 혼령이 내가 그림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불손하다고 진노하신 것이리라. 영규는 이미 죽었고, 나도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 그 그림을 이미 불태워버렸으니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경은 수로왕의 직계 후손이니 예전처럼 제사를 지내는 것이 참으로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그의 나이 88세가 되어서 죽었다.

 

그의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단오일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 ; 미친 증세가 일어나다)하여 사당에 와서는 간원의 제물을 치워버리고, 자기가 준비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술잔을 세 번 올리기도 전에 갑자기 질(疾 ; 질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 말에, “함부로 지내는 제사에는 복(福)이 없고 도리어 앙(殃 ; 재앙)만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지난번에는 영규가 그랬고 나중에는 준필이 그랬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이르는 말이던가? 또 적도(賊徒 ; 도적)들이 사당 안에 금(金)과 옥(玉)이 많다고 여기고는, 때문에 이를 훔쳐가려고 하였다.

 

도둑들이 처음 왔을 때는, 갑주(甲冑 ;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다)를 하고, 활에 살을 먹인 한 용사(猛士)가 사당 안에서, 나와서는 사방으로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어 7~8명이 죽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이 지나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자나 되는 큰 망(蟒 ; 구렁이)이 눈에서 번갯불을 번쩍이며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였다. 겨우 살아난 자들도 죄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흩어져 도망쳤다.

 

그래서 릉원(陵園 ; 왕릉)의 안팎에 반드시 신물(神物 ; 신령스러운 존재)이 있어서 왕릉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9년 한(漢)나라 건안(建安) 4년 기묘에 처음 사당을 세운 뒤에, 지금(고려) 임금님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지 31년째인 1076년 대강(大康) 2년 병진까지 무릇 878년이나 되었지만, 쌓아올린 아름다운 흙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당시 심었던 아름다운 나무들도 마르지도 썩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그곳에 장식한 수많은 옥(玉)의 편편(片片 ; 조각조각)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고 무너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가락국(駕洛國)은 옛날에 멸망하였으니 체부의 말이 맞는다고 하겠지만, 수로왕의 사당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으니 체부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 

 

▲ <사진 좌> 봉황대 유적지 - 김수로왕은 구지봉에서 임금이 된 후, 봉황대에 왕궁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린다. <사진 우> 김수로왕릉의 쌍어문장 - 왕릉앞의 납릉정문에는 물고기 두 마리의 그림이 좌우에 쌍으로 새겨져 있다. 가야국의 상징. 물고기 두 마리(신어, 쌍어). 이 쌍어문은 인도의 아요디야국(허황후는 아유타국)에서 흔히보는 문양이라고 한다. 허황후의 고향 인도 아유타국에서는 “드라비다어”를 사용하였는데, 드라비다어로“가야(가락)”은 물고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야국은 “물고기나라”라는 뜻인데, 당시 김해 앞바다에 수산자원이 풍성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 TIN 뉴스

 

이 가운데에는 또 수로왕을 사모(思慕)해서 하는 희락(戲樂 ; 놀이와 노래)이 있기도 하다.

 

매년 7월 29일이면 토인(土人 ; 일반 백성. 주민)들과 리졸(吏卒 ; 벼슬아치. 아전과 병졸)들이 승점(乘岾 ; 위쪽 고개마루)에 올라가서 유막(帷幕 ; 장막)을 치고, 주식(酒食 ; 술과 음식)을 먹으며 환호(歡呼)하면서 동쪽과 서쪽을 바라본다.

 

장건(壯健 ; 건장)한 인부(人夫 ; 사내)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한쪽은 망산도(望山島)에서 준(駿 ; 준마. 빠른 말)을 타고 발로 차서 침침(駸駸 ; 나아감이 썩 빠르다)하게 하여, 육지(땅)에서 경주(競湊 ; 다투어, 경쟁하여 달리다)하고, 다른 한쪽은 범범(泛泛 ; 물에 떠다니다)하는 익수(鷁首 ; 물새모양의 뱃머리)가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하여 앞다투어 달려간다.

 

대체로 이것은 옛날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는 급히 임금(수로왕)에게 달려가 보고하였던 유적(遺跡 ; 흔적)인 것이다.

 

나라가 망한 뒤로 대대(代代)로 그 이름이 달랐다. 681년 신라 정명왕(政明王 ; 신문왕)이 임금자리에에 올랐던 개요(開耀) 원년 신사에는, 이곳을 금관경(金官京)이라 하여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 뒤 259년이 지나 우리(고려) 태조가 통합한 뒤에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였고,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48년 동안이었다.

 

그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이나 김해부(金海府)가 되었으며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 동안이었다. 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이 64년 동안이었다.

 

991년 순화(淳化) 2년에 김해부(金海府) 양전사(量田使)였던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이렇게 조사하여 장(狀 ; 장계. 문서)로 조정에 아뢰었다.  “수로릉(首露陵) 왕묘(王廟)에 소속된 전결(田結 ; 밭)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옛날의 관례대로 15결(十五結)로 하고, 그 나머지는 나누어서 부(府 ; 관청)의 역정(役丁 ;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소사(所司 ; 그 일을 담당한 관서)에서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 선지(宣旨 ; 임금의 뜻)를 알리며 말하였다. “하늘이 내린 란(卵 ; 알)이 성군(聖君 ; 거룩한 임금)으로 변화하여서, 임금자리에 있으면서 연령(延齡 ; 수명)이 158세였다. 저 삼황(三皇) 이하(而下 ; 이래)로, 이에 비길 만한 이가 없었다.”

 

수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조상 때부터 사당에 롱무(隴畝 ; 밭)를 소속시켜 왔는데, 지금에 와서 이를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의아스럽고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거듭 아뢰자, 조정(朝廷)에서도 그렇다고 여겨서, 밭의 반은 사당에 소속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김해부에서 일하는 향인(鄕人 ;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래서 절사(節使 ; 양전사)가 조정의 명을 받아 절반은 사당에 소속시키고 나머지 절반은 김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급하였다. 일이 거의 끝나갈 즈음 양전사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갑자기 7~8명의 귀신(鬼神)을 보았는데, 류설(縲紲 ; 밧줄)을 손에 쥐고, 도검(刀劒 ; 칼)을 잡고 와서 말하였다.

 

“네 죄가 가장 크니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는다는 말에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깜짝 놀라서 깨었다.

 

그리고 곧 질채(疾瘵 ; 질병)가 들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중에 달아나다가 그 질병이 더 심해져 관문을 지나다 죽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 뒤에 명을 받고 도착한 양전사가 그 밭을 조사해보니, 11결12부9속(十一結十二負九束)으로, 부족한 것이 3결87부1속이었다.

 

그래서 없어진 밭을 조사하여 중앙과 지방 관청에 보고하자 넉넉하게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이 외에도 또 고금(古今)에 탄식(嘆息)할만한 일이 있다. 원군(元君 ;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金銍王)은 매우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또 진리를 정성스럽게 받들었다.

 

세조모(世祖母 ; 시조모)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452년 원가(元嘉) 29년 임진에 수로왕과 황후가 합혼(合婚 ; 결혼)한 땅에 절을 창건하고, 왕후사(王后寺)라고 하였다.

 

벼슬아치를 보내 그 근처의 평전(平田 ; 밭) 10결을 심량(審量 ; 측량)하고, 3보(三寶)의 비용으로 공억(供億 ; 쓰게 하다)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뒤 500년 뒤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절에 바친 밭과 땔나무를 마련하는 땅이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 그러자 절의 삼강(三綱)이 왕후사가 절의 땔나무를 마련하는 땅 동남쪽 안에 있다고 하여 절을 철폐하고 장(莊 ; 농장)으로 만들었다.

 

가을에 추수하여 겨울을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먹이고 소를 기르는 구(廐 ; 외양간. 마구간)으로 만들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로다! 세조(世祖) 이하 9대손의 연대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그 명(銘 ; 기록된 글)은 이러하다. 천지가 처음 열리니 /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아졌다네 / 인륜이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자리는 없었다네 / 중조(中朝 ; 중국 왕조)는 여러 번 생겼지만 동국(東國 ; 우리나라)에는 경(京 ; 서울)이 나누어져서 계림(鷄林)이 먼저 정하여 졌고 / 가락(駕洛)이 뒤에 생겼다네 다스릴 자 없었으니 / 누가 백성을 보살필까 / 드디어 현조(玄造 ; 조물주. 하나님)께서 이 창생(蒼生 ; 백성)들을 돌아 보셨다네 / 그래서 하늘이 부명(符命 ; 임금의 징표)를 주고 특별히 정령(精靈)을 내려 보내셨다네 / 산 속에 알을 내리셨는데 /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네. 그 안은 아직도 막막(漠漠)했고 / 그 바깥도 역시 명명(冥冥 ; 어두컴컴하다)했다네. 바라보면 모습이 없는 듯했지만 / 들어보면 소리가 있었다네.

무리들이 노래하며 아뢰었고 / 무리들이 춤을 추며 바치었다네 / 7일이 지난 뒤에야 일시에 안정이 되었다네 /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었고 / 하늘은 더욱 푸르렀다네.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 한 가닥 자줏 빛깔의 끈에 매달렸다네. 특별한 나라 이상한 흙에 / 옥(屋 ; 집)들이 연이어 있었다네.

 

관자(觀者 ; 구경하는 사람) 도(堵 ; 담장)처럼 둘렀고

 

도자(覩者 ; 알아보는 사람) 갱(羹 ; 많다. 죽)처럼 모여들었다네. 다섯은 각 고을로 갔고 / 하나만 이 성(城)에 남았다네 / 같은 때 같은 행적형과 동생은 같았다네 / 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아서 / 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네. 임금자리에 처음 오르자 / 환구(寰區 ; 대궐)에는 정이 넘처나고 / 대궐은 옛날 제도를 따랐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범했다네 / 만 가지 나랏일 비로소 힘써서 / 여러 정사를 시행했다네. 기울어지지도 치우치지도 않아 / 오직 한결같이 정밀했다네 / 길 가던 자는 길을 사양하고 농사 짓는 이들은 밭 갈기 먼저 하라 양보했다네 / 사방(四方)이 모두 편안해지고만백성 태평성대 맞았다네 / 이윽고 풀잎의 이슬 마름처럼 / 장수하던 명 보전하지 못하였다네 건곤(乾坤 ; 하늘과 땅)의 기운이 변하였고 / 조야(朝野 ; 온 백성)가 모두 슬퍼했다네. 그 행적은 금(金)처럼 빛났고 / 그 명성은 옥(玉)처럼 울렸다네. 래묘(來苗 ; 후손)이 끊어지지 않아 / 천조(薦藻 ; 사당의 제사) 참으로 향기로웠다네. 세월이 비록 흘러도 / 그 규의(規儀)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네.

 

▲ 옛부터 “ 신선을 초대한다 ” 고 해서 초선대(招仙臺)라고 하며, “현자를 청한다”는 뜻에서 초현대(招賢臺)라고 불리는 불리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七点山)의 선인(仙人)을 초대하여 이곳에서 가야금과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왕이 앉은 연꽃무늬 자리와 바둑판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괴석 사이에는 당대 정승이 나올 운교초선형(雲橋招仙形)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 TIN 뉴스

 

거등왕(居登王) ;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이고, 어머니는 허왕후(許王后)이다. 199년 한(漢)나라 건안 4년 기묘 3월 23일에 임금 자리에 올라 5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가, 253년 한(漢)나라 가평(嘉平) 5년 계유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서는, “성(姓)씨는 김(金)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世祖 ; 시조)가 금란(金卵 ; 금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姓)씨를 김(金)씨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마품왕(麻品王) ;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金)씨이다. 253년 한(漢)나라 가평 5년 계유에 임금자리에 올라, 3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291년 한(漢)나라 영평(永平) 원년 신해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金)씨이다. 291년 한(漢)나라 영평 원년에 임금자리에 올라 5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346년 한(漢)나라 영화(永和) 2년 병오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 김(金)씨이다. 346년 한(漢)나라 영화 2년에 임금자리에 올라, 6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407년 한(漢)나라 의희(義熙) 3년 정미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407년 한(漢)나라 의희(義熙) 3년에 임금 자리에 올라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여당(女黨 ; 여자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그래서 계림(鷄林 ; 신라)이 가락국을 치려고 하였는데, 가락국의 신하인 박원도(朴元道)가 말하였다. ““유초(遺草)를 깎아도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그 어디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 ; 점괘)를 얻었는데, 무(拇 ; 손가락)로 한 그 풀이에서 소인들을 물리치면 군자들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역괘(易卦 ; 주역의 괘)의 내용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이 옳다고 여기고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정치를 고쳐 길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421년 한(漢)나라 영초(永初) 2년 신유 5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도녕(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金)씨이다. 421년 한(漢)나라 영초 2년에 임금자리에 올라,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451년 한(漢)나라 원가(元嘉) 28년 신묘 2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451년 한(漢)나라 원가 28년에 임금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세조(世祖 ; 시조)와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왕후가 처음 수로왕과 만나 혼인한 곳에 절을 짓고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납전(納田 ; 밭) 10결을 바쳐 그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492년 한(漢)나라 영명(永明) 10년 임신 10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492년 한(漢)나라 영명 10년에 임금자리에 올라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521년 한(漢)나라 정광(正光) 2년 신축 4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으로,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 김(金)씨이다. 521년 한(漢)나라 정광 2년에 임금자리에 올라,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562년 한(漢)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임금이 친히 군졸(軍卒)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임금은 동기(同氣 ; 형제)인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王子)와 상손(上孫 ;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3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角干),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 에서는, “532년 양(梁)나라 대통(大通) 4년 임자에 신라에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의(議 ; 논평. 일연)하여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면, “532년 가야 구형왕이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에 신라에 국토를 바치고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서기 42년 한(漢)나라 건무 18년 임인부터 532년 구형왕 말년의 임자년까지 490년이 된다. 만일 다른 기록으로 고증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562년 위(魏)나라 보정 2년 임오이니, 30년을 더하여서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에서는 이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놓는다.”

 

▲  김해가야테마파크에서 선보인 김수로와 허황옥의 운명적인 만남을 담아낸 뮤지컬 공연   © TIN 뉴스

 

◎ 자주 빛깔의 끈으로 내려온 알 이야기 ; 5가야(五伽倻)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가락기(駕洛記)의 찬(贊)을 살펴보면, “‘자영(紫纓 ; 자줏 빛깔의 끈)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6원란(六圓卵 ; 둥근 알 6개)을 내려주었는데, 이 중 5개는 각읍(各邑 ; 고을)에 돌려보냈고, 1개는 자성(玆城 ; 여기 이 성)에 두었다. 그래서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나머지 5개는 각각 5가야의 주(主 ; 군주)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금관(金官 ; 금관가야)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고려의 사략(史略)에는 금관을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아라가야(阿羅伽耶 ; 함안. 아야가야), 고령가야(古寧伽耶 ; 함녕. 창녕), 대가야(大伽耶 ; 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 ; 경산. 벽진), 소가야(小伽耶 ; 고성) 등이다.

 

우리 고려의 사략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940년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 첫째는 금관(金官 ; 김해부), 둘째는 고령(古寧 ; 가리현), 셋째는 비화(非火 ; 창녕, 또는 고령),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 또는 토해니사금. 재위기간 서기 57-80년)이 남해왕(南解王) 시절에 가락국(駕洛國) 바다에서 선(船 ; 배)을 타고 와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민(臣民 ;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고(鼓 ; 북)를 시끄럽게 치며 그를 맞이하여 머무르게 하려고 하였지만, 그 강(舡 ; 배)은 곧 날아가듯이 달아나서, 계림(雞林 ; 신라)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지금(고려)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  김해가야테마파크에서 선보인 김수로와 허황옥의 운명적인 만남을 담아낸 뮤지컬 공연  © TIN 뉴스

 

◎ 빨간 빛깔의 직물 돛을 달고 온 허황후(왕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이었을 때 세조(世祖 ;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왕비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서기 48년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애초에 공주(公主)가 2친(二親 ;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다가, 신(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아버지인 임금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아뢰자, 임금이 이 탑(塔)을 싣고 가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곧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애(南涯 ; 남쪽 해안)로 와서 정박하였다.

 

그 배에는 비범(緋帆 ; 빨간 빛깔의 직물 돛)과 천기(茜旗 ; 빨간 빛깔의 깃발)를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 ; 빨간 빛깔의 옥)을 싣고 왔기 때문에, 지금(고려)도 이곳을 주포(主浦)라고 하고, 처음에 언덕 위에서 릉고(綾袴 ; 견직물 치마. 바지. 아래옷)를 벗었던 곳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빨간 빛깔의 깃발이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왔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首露王)이 황후를 맞이하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년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해동(海東)에는 사(寺 ; 절)를 세우고, 법(法  ; 불법)을 받드는 일이 아직 없었다.

 

상교(像敎 ;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토인(土人 ; 지방 사람)들도 아직 불교를 믿지 않았고, 그래서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도 절을 세웠다는 문(文 ; 글)이 없었다.

 

452년 가야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한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여서[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이니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고려)까지도 복(福)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의 왜(倭 ; 왜적)까지 진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塔)의 방향은 4면(四面)에 5층(五層)이데, 그 조루(彫鏤 ; 조각)는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희미한 빨간 빛깔의 반색(斑色 ; 빛깔 무늬)이 있고, 그 질(質 ; 질감)이 매우 연하여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돌)가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한, “‘계관(鷄冠 ;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金官國)을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  김해 수릉원 입구에 있는 허황옥 동상. 허황옥(許黃玉, 33년 ~ 189년)은 가락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의 부인으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한다. 야유타국(월지국)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 TIN 뉴스

 

 

◈ 동사강목에 수록된 가야의 역사와 그 풍속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의하면, 서기 42년 봄 3월, 가락(駕洛) 사람이 김수로(金首露) 형제 6명을 세워 군(君 ; 임금)으로 삼고, 가야(加耶)를 나누어 다스렸다.

 

가락(駕洛)은 옛날 변한(卞韓)의 땅이다. 처음에는 군신(君臣)의 위호(位號)가 없고, 9간(干)이 있었으니, 아도(我刀), 여도(汝刀), 피도(彼刀), 오도(五刀), 유수(留水), 유천(留天), 신천(神天), 신귀(神鬼), 오천(五天)이 그것으로서 각각 추장(酋長)이 있었다. 민중은 총 7만5천명이었는데 산과 들에 모여 살았다.

 

어느 날 9간이 모여 계사(禊事 ; 계제사, 곧 3월 3일 상사에 물가에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구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더니, 이때 김수로(金首露)라는 이가 형제들과 구지봉(龜旨峯 ; 김해에 있는 산)에 올라 가 가락의 9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9간이 그곳에 이르러서 김수로 등 그 형제 여섯 사람의 용모가 모두 기위(奇偉)하고 장대한 것을 보고는 여럿이 모두 경이(驚異)하여 이들을 세워 군(君 ; 임금)으로 삼았는데, 김수로가 연장자였으므로 그 국호를 대가락(大駕洛 ; 김해부)이라 하고, 나머지는 가야(伽耶)라고 하였다 한다.

 

따라서 나머지 5사람은 각각 5가야의 군(君)이 되니, 아라가야(阿羅伽耶 ; 함안군), 고령가야(古寧伽耶 ; 함창), 대가야(大伽耶 ; 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 ; 성주), 일설에는 벽진가야(碧珍伽耶), 소가야(小伽耶 ; 고성)가 그것이다.

 

서기 42년에 있은 일이다. 가야의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가락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국호를 고쳤다.

 

▲  악성 우륵 가야금 연주상. 뒤편에는 우륵 박물관. 외형은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형상으로 건립됐다. 우륵(于勒, 생몰년 미상)은, 대가야의 악사이다.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모방해 가야금(伽倻琴)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다. 이후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부하여 대가야의 음악을 신라에 전수하였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조선의 박연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 TIN 뉴스

 

551년 신라 진흥왕 12년, 가야국 악사 우륵(于勒)이 신라에 망명하여 왔다. 처음에 가야 임금 가실(嘉實)이 당(唐 ; 옛날 당나라)나라의 악부(樂部)에 쟁(箏)이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르니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에 쟁(箏)을 모방하여 12현금(十二絃琴)을 만들게 하니, 이것은 12월을 상징한 율(律)이다.

 

이에 악사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을 시켜서 하가야(下伽倻), 상가야(上伽倻) 등 12곡(曲)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 악기를 일러 가야금(伽倻琴)이라 하였다.

 

이때 우륵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 여기고 그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갔다.

 

신라 임금이 낭성(娘城 ; 청주)을 순회하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임금은 기뻐서 그들을 국원(國原 ; 충주)에 두고, 대내마인 법지(法知), 계고(階古)와, 대사(大舍)인 만덕(萬德) 등 세 사람에게 그들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 사람들의 재능에 맞추어 음악을 가르쳤는데,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이 3사람이 12곡을 다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은 번거롭고 음란하니, 아악(雅樂)이 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간추려서 다시 5곡조를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5곡을 다 듣고서는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음란한 데로 흐르지 않고, 구성지면서도 슬픔에 치우치지 않으니 정악(正樂)이라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이를 연주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한다.

 

◈ 해동역사에 수록된 가야의 역사와 그 풍속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의하면, 살펴보건대, 가라(加羅)는 바로 가락국(駕洛國)이다.

 

남제서(南齊書)에는 가라국왕(加羅國王) 하지(荷知)로 되어 있고, 동사(東史)에는 가락국왕(駕洛國王) 질지(銍知)로 되어 있는데, 대개 ‘가(加)’ 글자와 ‘가(駕)’ 글자는 글자 자체가 변한 것이고, ‘라(羅)’ 글자와 ‘락(洛)’ 글자는 음이 전이된 것이다. ‘가라’를 동사에는, 또 ‘가야(伽倻)’라고도 칭하는데, 삼국사기에, “가라(加羅)는 일명 가야(伽倻)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가야는 바로 삼국지 위서(魏書)에서 말하고 있는 ‘구야(狗耶)’이다. 우리나라 말에 ‘구(狗 ; 개)’ 글자를 ‘가(加 ; 개)’라고도 하므로 ‘가야’가 전이되어 ‘구야(狗耶)’가 된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에서는 ‘가라’, ‘구야’라고 칭하고,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는 ‘가락’, ‘가야’라 칭한 것은 실은 하나의 나라를 일컫는 것이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金首露)는 서기 42년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에 개국하여 김해부(金海府)에 도읍하였고, 그의 동생 5명도 각각 5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그 뒤에 6가야로 되었다가 뒷날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삼국지(三國志), 변한(弁韓) 12국 가운데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이 있다. 오학편(吾學編)에는, “일본(日本)에 1백여개의 부용국(附庸國)이 있는데,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耶韓國)이 가장 크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구야한국이란 것은 구야(狗耶)가 변한(弁韓)의 속국(屬國)이므로 그렇게 이른 것이다.

 

남제서(南齊書) 열전(列傳) 가라국(加羅國)편에 의하면, “가락국(加羅國)은 삼한(三韓)의 한 종족이다. 479년 건원(建元) 원년, 국왕(國王)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려 가로되, 널리 헤아려 비로소 조정에 올라오기 시작하니 멀리 있는 이(夷)종족도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지(贄 ; 선물. 폐백)를 받들고 와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북사((北史))에, 607년 수((隋)나라 양제(煬帝) 대업 3년 4월 임술에, 가라국(迦羅國)이 <살펴보건대, 남제서(南齊書)에는 가라(加羅)로 되어 있다>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또 동사를 보면, 가락국은 수로왕에 의해 서기 42년부터 나라가 시작되어 구해(仇亥)에 이르러서 532년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에 와서 항복하였으니, 총 10임금 491년간 존속하였다.

 

▲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 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TIN 뉴스

 

<‘임나’에 대하여>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의하면, 살펴보건대, 임나(任那)는 혹은 임라(任羅)로도 되어 있다. 지금은 그 지계(地界)가 명확하지 않은데, 대개 변한(弁韓)의 지역이며, 신라의 여국(與國 ; 같은 나라)이다.

 

일본기(日本紀)에는 임나를 가라(加羅)의 별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서(宋書)에서는 왜왕(倭王) 무(武)가 자칭 도독신라임나가라제군사(都督新羅任那加羅諸軍事)라고 하였으니, 임나와 가라는 마땅히 2나라로, 바로 6가야 가운데 한 나라이다.

 

통전(通典)에는,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사람들이 전역(戰役)을 감당하지 못하여 줄지어 신라로 들어갔다. 이에 신라가 드디어 강성하여져서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송서(宋書)에는, 태조 원가(元嘉 ; 남조 문제의 연호) 연간에, 왜왕 진(珍)이 즉위하여 자칭 사지절 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이라 하면서 표문을 올려 임명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28년에 왜왕 제(濟)에게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를 가해 주었다.

 

478년 순제(順帝) 승명(昇明) 2년에 왜왕 무(武)가 자칭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이라 하면서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려 임명해 주기를 요청하였다”라고 하였다. <끝>

 

 

 

 

▲ ©TIN 뉴스

 

 

 

 

박원호TINNEWS

영남지사장(논설위원 겸직)

前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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