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의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⑤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6
KoreaFashionNews | 입력 : 2016/11/28 [09:47]

 

 ▲ 백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한 장면 © TIN 뉴스  


 

◎ 백제의 국운이 기울어지던 시기에 세상도 흉흉해지다

 

653년 백제 의자왕 13년 봄,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655년 백제 의자왕 15년 봄 2월, 태자(太子)의 궁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으며, 왕궁(王宮)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건축하였다. 같은 해 여름 5월, 성마(騂馬 ; 붉은 말)가 북악(北岳) 오함사(烏含寺)에 들어와서 불우(佛宇 ; 불당)를 돌면서 울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같은 해 가을 7월, 마천성(馬川城)을 중수하였다. 같은 해 8월, 임금이 고구려,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의 30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656년 백제 의자왕 16년 봄 3월,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황(淫荒 ;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 ; 혹은 정충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임금에게 상서(上書)를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바, 병혁(兵革 ; 전쟁)의 일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용병(用兵 ; 병사를 움직임.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上流)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 백강)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657년 백제 의자왕 17년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논밭이 적지(赤地 ; 빨간 빛깔의 땅)가 되었다. 659년 백제 의자왕 19년 봄 2월, 호(狐 여우) 떼가 궁중(宮中)에 들어 왔는데 하얀 빛깔의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서안(書案 ; 책상)에 올라앉았다. 같은 해 여름 4월, 태자궁(太子宮)에서 자계(雌雞 ; 암탉)가 소황작(小黃雀 ; 참새)과 교미를 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 동잠(桐岑) 2성을 침공하였다. 같은 해 여름 5월, 왕도(王都 ; 서울) 서남쪽 사비하(泗沘河)에서 대어(大魚 ;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三丈 ; 3발)이었다. 같은 해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十八尺)이었다. 같은 해 가을 9월, 대궐 뜰에 있는 괴수(槐樹 ; 홰나무. 느티나무)가 사람이 곡(哭)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의 남로(南路 ; 남쪽 길)에서 귀(鬼 ;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 봄 2월, 왕도(王都 ; 서울)의 정수(井水 ; 우물물)이 혈색(血色 ;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西海) 해변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泗沘河)의 물이 핏빛처럼 빨갛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4월, 하마(蝦蟆 ; 두꺼비) 수만(數萬) 마리가 수(樹 ;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명이나 되고 재물(財物)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같은 해 여름 5월, 풍우(風雨 ;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2절의 탑(塔)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白石寺) 강당(講堂)에도 벼락이 쳤다. 현운(玄雲 ; 검은 구름)이 용(龍)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같은 해 여름 6월,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중들이 모두 선즙(船楫 ; 배의 돛대)과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야록(野鹿 ; 들사슴) 같은 견(犬 ;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 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路上)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 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3척(三尺 ; 3자) 가량 파내려 가니 구(龜 ;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월륜(月輪 ;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월신(月新 ;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임금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라고 하니 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궁남지에 세워진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은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싸워 죽은 백제시대 오천결사대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으로 매년 백제문화제시 오천결사대의 위국 충절을 기리는 충혼제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 TIN 뉴스

 

 

◎ 죽음을 알고 싸움장에 간 백제장군 계백

 

<삼국사기 열전(三國史記 列傳)에 의하면, 계백(階伯)은 백제 사람으로 사(仕 ; 벼슬)가 달솔(達率)이었다. 660년, 당(唐)나라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사(師 ;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하였다. 계백은 장군(將軍)이 되어 간사사(簡死士 ; 결사대) 5천명을 뽑아 이를 막고자 하며 말하였다. “나라의 한 사람만으로서 당(唐)나라와 신라의 대병(大兵 ; 많은 병사)을 당해내자니, 나라의 존망(存亡)을 알기 어렵게 되었다. 내 처노(妻孥 ; 아내와 자식)가 붙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두렵구나.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흔쾌히 죽는 것이 나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처자식을 다 죽였다. 황산(黃山)의 들에 이르러 3영(三營 ; 3진영)을 설치하였다. 신라 병사들과 맞닥뜨려 싸우려 할 때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며 말했다. “옛날 월(越)나라 임금 구천(句踐)은 5천명의 군사로 오(吳)나라 70만명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해서 승리를 쟁취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처절하게 싸웠다. 백제군 1명이 적군 1천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라 병사가 끝내 퇴각하였다. 이렇게 진퇴(進退)를 4번이나 거듭하다가, 끝내 힘이 다해 전사하였다.>

 

◎ 당(唐)나라에 가서 활약한 백제 장수 흑치상지 이야기

 

▲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에 대해서는 중국의 [신당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열전’에 전기가 실려 있다. ©TIN 뉴스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西部) 사람인데 키가 7척(七尺)여가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모가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達率)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唐)나라의 자사(刺史)와 같다고 한다.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소부(所部 ;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정방은 노왕(老王 ; 늙은 왕. 백제 의자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가까운 추장(酋長 ; 촌장) 10여명과 함께 달아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 ; 예산)에 웅거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명이나 되었다. 정방이 병사를 정비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드디어 2백여성(城)을 회복하였다.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3년)에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그를 초유(招諭 ; 불러 타이르다)하자, 그는 당(唐)나라 유인궤(劉仁軌)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는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가 되었으며, 수차례 정벌(征伐)에 종군하여 공(功)을 쌓아 특별한 작위와 상(賞)을 제수 받았다. 오랜 뒤에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이 되어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돌궐(突厥)을 쳐부수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左監門衛中郞將) 보벽(寶璧)이 돌궐을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차지하려 하자 황제가 상지와 함께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보벽이 단독으로 진공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전군이 함몰되었다. 보벽은 하리(下吏 ; 감옥의 벼슬아치. 옥리)에게 보내져 처형되고, 상지도 죄를 입어 공적이 없게 되었다. 그때 마침 주흥(周興) 등이 그가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였으므로, 상지는 조옥(詔獄 ; 중죄인을 다스리는 옥사)에 갇혔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상지는 아랫사람들을 은덕으로 다스렸다. 그가 타는 말이 병졸에게 채찍을 맞는 일이 생기자, 어떤 자가 병졸을 처벌하라고 하였다. 상지가 대답했다. “어찌 사사로운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관병(官兵)을 매질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휘하(麾下)의 부하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남겨둔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궁남지에 세워진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  © TIN 뉴스

 

◎ 백제의 비극, 전쟁으로 집들은 조잔해지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이다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 장군 유백영(劉伯英)과 우무위 장군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 장군 방효공(龐孝公) 등과 함께 병사 1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軍 ; 군사)을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정예 병사 5만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群臣)을 모아 전수(戰守 ;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常永)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速戰)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병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병사들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古馬彌知)의 현(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 병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사율(師律 ;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원(平原 ; 평탄한 벌판)과 광야(廣野 ;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 ; 기벌포)과 탄현(炭峴 ; 침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1부(一夫 ; 한 명의 병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1만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자량(資粮 ;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사졸(士卒)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연류(沿流 ; 강 흐름)에 따라 방주(方舟 ;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유경(由徑 ; 비탈길.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계(雞 ;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임금은 이 말을 따랐다.

 

임금은 또한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堦伯)을 시켜  수사사(帥死士 ;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병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임금은 병사를 모아 웅진(熊津)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陣)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眞都城) 1사(一舍 ;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임금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임금은 마침내 태자 효(孝)를 데리고 북비(北鄙 ; 북쪽 변경)로 도주하였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임금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임금의 아들 융(隆)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임금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나라 병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추(縋 ; 밧줄)를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나라 기치(旗幟 ; 깃발)를 세우게 하자, 태(泰)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임금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임금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 장군과 사병) 88명과 백성(百姓) 12,807명을 당나라 경사(京師 ;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호(戶)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도독부(五都督府)를 두어 각각 주현(州縣)을 통할하게 하고, 거장(渠長 ; 우두머리)을 뽑아서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을 삼아 이를 다스리게 하고, 낭장 유인원(劉仁願>)에게 명령하여 도성(都城)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문도(王文度)를 웅진 도독(都督)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임금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金紫) 광록대부(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옛날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수비(竪碑 ; 비석을 세움)하게 하였다. 왕자 융(隆)을 사가경(司稼卿)으로 임명하였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  예산 임존성(禮山 任存城)은 한국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 꼭대기에 있는 둘레 약 3km의 산성이다. 주류성과 함께, 귀실복신, 흑치상지, 지수신 등이 이끈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으나,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를 앞세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 TIN 뉴스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부도(浮屠 ;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풍(扶餘豐)을 맞아서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했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보내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나라 력(曆 ; 책력)과 묘휘(廟諱)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이(東夷 ; 동쪽 종족)를 평정하고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라고 말하였다. 유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熊津江) 어귀에 2개의 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유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任存城)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가 661년 당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이때 도침은 영군 장군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 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유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 후에는 우리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유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유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유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유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에게 군사를 주어 유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도(葛嶺道)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豐)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祭祀)만 주관하였다. 복신 등은, 유인원 등이 성(城)에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大使)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662년 당나라 용삭 2년 7월에 유인원, 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방책을 함락시켰는데, 병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병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새벽에 입성하여 8백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다.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淄 ; 치주), 청(靑 ; 청주), 래(萊 ; 동래), 해(海 ; 해주)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인사(孫仁師)에게 이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 유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라고 말하니, 유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陸軍)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과 군량 실은 선(船 ; 배)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4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주(舟 ; 배) 4백소(四百艘 ; 4백척)를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빨간 빛깔을 띄웠다. 이 때 임금 부여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寶劒)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부여충지(扶餘忠志) 등이 부여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지수신(遲受信)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명이었다. 소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沙吒相如)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개(鎧 ; 갑옷)과 장(仗 ; 병장기), 양비(粮糒 ; 양식. 군량) 등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그들 2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니,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하여금 그곳에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  공주 공산성에서 수습한 백제의 갑옷 조각(왼쪽). 오른쪽 사진에는 貞觀十九年(정관 19년), 즉 645년(백제 의자왕 5년)이라는 글자가 붉은색으로 또렷이 적혀 있다.   © TIN 뉴스

 

병화(兵火 ; 전쟁)으로 집들이 조잔(凋殘)해지고, 강시(殭屍 ; 시체)가 풀 더미처럼 쌓였다. 유인궤가 이 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戶口)를 등록하며, 리촌(理村 ; 마을.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도(道 ; 길.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橋梁)을 가설하고, 제언(堤堰 ; 제방)을 수축하고, 파당(坡塘 ; 저수지)을 복구하며, 농상(農桑 ; 농업과 길쌈)을 장려하고, 빈핍(貧乏 ; 가난한 자)들을 진(賑 ; 진휼. 구제)하고, 고로(孤老 ; 고아와 노인)를 양육하게 하게 하였으며,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임금이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665년 당나라 인덕 2년, 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백마(白馬)를 잡아서 서로 맹세하였다. 유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철계(鐵契 ; 쇠로 만든 책)에 금서(金書 ‘ 금으로 글을 씀)하여 신라의 종묘 안에 두게 하였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新羅紀)에 보인다.

 

유인원 등이 귀국하니, 융은 군사가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당나라 경사(京師 ; 서울)로 돌아갔다. 당나라 의봉(儀鳳 ; 재위 676-678년) 때 융을 웅진(熊津) 도독(都督) 겸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곧 이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에 신라가 강성하여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재위 690-705년)가 또한 그의 손자 경(敬)으로 하여금 백제의 임금자리를 계승하게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新羅), 발해(渤海), 말갈(靺鞨)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백제)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시(신라 태종무열왕 때) 백제의 말왕(末王 ; 마지막 임금)인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원자(元子 ; 맏아들)였다. 그는 영웅스럽고 용맹하며, 담기(膽氣 ; 담력)가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고 불렀다. 641년에 백제의 임금자리에 오르자, 술과 여자에 빠져 음란을 행하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강력하게 충언을 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옥(獄 ; 감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몸이 약해져 빈사(濱死 ; 죽을 지경)에 이르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충신(忠臣)은 죽어도 군(君 ; 임금)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한 말씀만 드리고 죽고자 하옵니다. 신(臣)이 일찍이 시변(時變 ; 세상의 변화)을 살펴보니, 반드시 큰 병혁(兵革 ;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병대를 부릴 때는 그 지세를 잘 살펴야 하오니, 상류(上流)에 진을 치고 적(敵)을 맞이한다면 나라를 보전(保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병사가 쳐들어온다면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시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59년 백제 의장왕 19년, 백제의 오회사(烏會寺)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6시간 동안 절을 돌면서 공덕을 닦았다. 같은 해 2월, 중호(衆狐 ; 여우무리)가 의자왕의 궁중(宮中)에 들어왔는데, 하얀 빛깔의 여우 한 마리가 좌평(佐平)의 서안(書案 ; 책상)에 올라가서 앉았다. 같은 해 4월, 태자궁(太子宮)의 자계(雌雞 ; 암탉)가 소작(小雀 ; 작은 참새)와 교혼(交婚 ; 교미)을 하였다. 같은 해 5월, 사비수(泗沘水) 안(岸 ; 물가.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三丈 ; 3길)이나 되었다. 그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같은 해 9월, 궁중에 있는 괴수(槐樹 ; 홰나무)가 마치 사람이 곡(哭)하는 것처럼 울었고, 밤에는 귀(鬼 ; 귀신)가 궁의 남쪽 로(路 ; 길) 위에서 울었다. 660년 백제 의장왕 20년 2월, 백제 왕도(王都)의 우물물이 혈색(血色 ; 핏빛깔)이 되었고, 서해 바닷가에는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 사비수(泗沘水)의 물이 핏빛깔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하마(蝦蟆 ; 개구리) 수만(數萬)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었고, 왕도의 시인(市人 ; 시만. 백성)들은 아무 이유 없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마치 누가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놀라서 엎어져 죽는 자들이 백여명이나 되었으며, 재물(財物)을 잃어버린 자(者)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해 6월, 왕흥사(王興寺) 승(僧)들 모두가 마치 선즙(船楫 ; 배무리)이 큰 물결을 따라서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다. 야록(野鹿 ; 들사슴)과 같은 대견(大犬 ; 큰 개)이 서쪽에서 사비수의 물가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王宮)을 향해 짖었는데, 얼마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성(城) 안의 개들이 로(路 ; 길) 위쪽에 모여서 폐(吠 ; 짖다)하기도 하고 곡(哭 ; 울다)하기도 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흩어졌다. 어떤 한 귀신이 궁에 들어와서 크게 외쳤다.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그리고 곧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파보게 하였다. 3척(三尺 ; 3자) 정도 파 들어가자 구(龜 ;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배(背 ; 등)에, ‘백제는 원월륜(圓月輪 ; 수레바퀴 같은 둥근 달)이요, 신라는 신월(新月 ; 초승달)과 같다’라는 문(文 ; 글씨)이 쓰여 있었다. 무자(巫者 ; 무당)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말하였다. “원월륜(圓月輪)이라는 것은 가득 찬 달을 일컫는 것입니다. 달은 차면 이지러지는 법입니다. 신월(新月)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지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화가 나서 그 무당을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원월륜(圓月輪)이라는 것은 강성하다는 것이고, 신월(新月)과 같다고 하는 것은 미미하게 미약하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건대, 국가(國家 ; 우리나라)는 강성해지고, 신라는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기뻐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은 백제(百濟)의 나라 안에 괴변(怪變)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660년 인문(仁問)을 사신으로 보내 당(唐)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은 조(詔 ;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神丘道) 행책총관(行策摠管)으로 삼아, 자(字)가 인원(仁遠)인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十三萬)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였다.[우리나라 기록에는 군사가 122,711명이고, 배가 1,900척이라 하였지만 당사(唐史)에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도록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의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왕은 김유신에게 정병(精兵 ; 정예병) 5만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워서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좌평 의직(義直)이 나아가 이렇게 아뢰었다. “당병(唐兵 ; 당나라 병사)은 멀리 바다를 건너왔지만 물에서 싸우는 것은 익숙하지 못하고, 라인(羅人 ; 신라 사람)들은 대국(大國)의 지원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인(唐人)들도 실리(失利 ; 이익을 잃다)한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빨리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인(唐人)들과 결전(決戰)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아옵니다 라고 하였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병(唐兵)은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속전(速戰 ; 빨리 싸우다)하려고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인(羅人)은 우리 군사에게 여러 번 패한 적이 있으므로, 우리 병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계책은 마땅히 당인(唐人)의 로(路 ; 길)를 막아 그들이 사로(師老)를 기다리면서, 우선 일부 군사를 편성하여 신라를 쳐서 그 예기(銳氣 ; 기세)를 꺾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기회를 엿보아 합전(合戰 ; 함께 싸우다)한다면 전군(全軍)을 지킬 수 있고, 나라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오히려 머뭇거리며 누구의 대책을 따라야 할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짓고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양을 가 있었다.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았다. 사태가 급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흥수가 말하였다. “대개(大槪 ; 대체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사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류설(縲絏 ; 묶인 죄인. 귀양)을 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자의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당병(唐兵)이 백강(白江 ; 기벌포)에 들어오게 하여 물결을 따라오면 강의 폭이 좁아서 부득(不得)이 방주(方舟 ; 네모난 배. 군선)가 한 줄로 올 것이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에 올라와 작은 길을 따라오면 부득이 말을 한 줄로 타고 올 것입니다. 바로 이때 병사를 풀어 공격하면, 롱(籠 ; 대롱. 닭장)에 든 닭이요, 망(網 ; 그물)에 걸린 물고기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구나! 또 당(唐)나라와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장군(將軍) 계백(階伯)에게 수사(帥死 ; 결사대) 5천명을 이끌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신라 병사와과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4합(四合 ; 4번 싸우다)하여 모두 이겼지만, 병력이 적고, 힘이 다하여서 마침내 패하였고 계백도 죽었다. 신라와 당(唐)나라 병사는 연합하여 진군하여 나루 어귀에 다다라 강(江) 가에 주둔하였다. 이때 갑자기 조(鳥 ;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돌며 날아다녔다. 그래서 점을 쳐보니 이러한 점괘가 나왔다. 반드시 원수(元帥 ; 우두머리 장수)가 상(傷 ; 다치다) 할 것이다.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병사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말하였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민심에 순종하여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떻게 불길한 일이 있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신검(神劍)을 뽑아서 그 새를 겨누었더니, 그 새가 찢어져 자리 앞에 떨어졌다. 그제야 소정방은 백강의 왼쪽 기슭으로 나와 수산(垂山 ; 드리워진 산 밑)에 진(陣)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왕사(王師 ; 임금의 군사)가 조(潮 ; 밀물)를 타고 축로(舳艫 ; 배. 전선)가 꼬리를 물고 전진하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쳐들어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都城)으로 달려가 1사(一舍 ; 제1막사. 30리 밖)에서 멈추었다. 성(城 ; 왕성) 안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막았지만 또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당인(唐人)들이 승세를 몰아 성으로 들이닥쳤다. 임금은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구나!” 마침내 태자 융(隆)과 함께 북비(北鄙 ; 북쪽 변방)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城)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임금이 되어, 무리를 통솔하여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임금인 태(泰)에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 태자와 함께 탈출하셨는데. 숙(叔 ; 숙부. 아제)께서 마음대로 임금이 되었으니, 만일 당병(唐兵)이 포위를 풀고 물러간다 해도 우리들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좌우(左右 ; 측근)들을 거느리고 추(縋 ; 끈. 밧줄)를 타고 성(城)을 넘어 탈출하였다. 백성들도 모두 뒤를 따라갔지만, 태(泰)는 이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들에게 첩(堞 ; 성벽. 성의 담)을 넘어 들어가 당(唐)나라 기치(旗幟 ; 깃발)를 꽂게 하자, 태(泰)는 군박(窘迫 ; 궁지에 몰리다)하여서, 곧 성문을 열고 목숨을 빌었다. 이렇게 되어 백제 임금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大臣) 정복(貞福)이 여러 성(城)과 함께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임금 의자(義慈)와 태자 융(隆), 왕자 태(泰), 왕자 연(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을 당(唐)나라 수도인 경사(京師)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五部) 37군(三十七郡) 200성(二百城) 76만호(七十六萬戶)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당(唐)나라는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 등 5도독부(五都督府)를 나누어서 설치하고, 거장(渠長 ; 우두머리)을 뽑아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삼아서 각각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도성(都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백제의 남은 무리(백성)를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데리고 가서 당(唐)나라 황제를 뵈었다. 황제는 포로들을 꾸짖기만 하고, 그 죄는 용서해 주었다. 임금(의자왕)이 그곳에서 병(病 ; 질병)이 들어 죽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의 작위를 주고, 구신(舊臣 ; 옛날 신하)들이 부림(赴臨 ; 조문하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나란히 비(碑 ; 비석)도 세워 주었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일컫기를, 부여성(扶餘城) 북각(北角 ; 북쪽 모퉁이)에 대암(大岩 ; 큰 바위)이 있는데, 그 아래에 있는 강수(江水 ; 강물)를 굽어보고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제후궁(諸後宮 ; 여러 후궁들)과 함께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차라리 자진(自盡 ; 자살)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 ; 떨어져 죽은 바위, 낙화암)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이언(俚諺 ; 속담)은 잘못된 속설이다. 단지 궁인(宮人 ; 궁녀)들만 떨어져서 죽었을 뿐이고, 의자왕은 당(唐)나라에서 졸(卒 ; 죽다)하였다. 당사(唐史)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 <끝>

 

 

▲ ©TIN 뉴스

 

 

 

박원호TINNEWS

영남지사장(논설위원 겸직)

前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whpark@tinnews.co.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관련기사목록
Daily News
아바타와 현실 모델, 나란히 런웨이 서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헤드폰 케이스도 패션이 되는 세상
▶출처: YaLocalOffgod Instagram▶출처: YaLocalOffgod Instagram세계는 더 이상
런웨이에 아바타와 현실 모델 나란히 등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2024 F/W 밀라노 패션 위크 속 올해 패션 키워드
지난 21일(현지시간)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개최된 2024 F/W 밀라노
[칼럼] ‘지속 가능한 패션’이라는 환상
최근 몇 년 동안 패션업계에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유행
코닥어패럴, 런칭 5년 만에 ‘중국 진출’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웨어 브랜드 ‘코닥어패럴’이 중국 시장
佛 화장품 ‘세포라’, 한국 떠난다
프랑스 명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롯데자이언츠, ‘윌비’ 달고 뛴다
㈜형지엘리트(부회장 최준호)가 3월 19일 프로야구단 ‘롯데자이언
안다르, 시장 둔화에도 외형·내실 다 잡았다
애슬레저 리딩 브랜드 안다르가 지난해 매출액 2026억원, 영업이익
코오롱스포츠, 기능성+스타일+친환경 강화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이하 코오롱FnC)이 전개하는 아웃도어 브
9월 밀라노 패션위크에 K-패션 데뷔
올해 9월 내년도 봄과 여름의 패션 트렌드를 선보이는 밀라노 패션
SFI, ESG 평가 이슈별 우수기업 선정
지속가능패션이니셔티브(추진위원장 주상호, 이하 ‘SFI’)는 국내
신원, 하이엔드 스트리트 ‘GCDS’ 전개
㈜신원이 공식 수입 전개하는 이탈리아 하이엔드 스트리트 브랜드
K패션, 브랜딩과 DX로 글로벌 팬덤 만든다
이베이, 알리바바, 마플 등 글로벌 이커머스 플랫폼부터 세일즈포
상하이 패션위크를 활용한 中 진출 전략
한국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가 중국에 진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