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 의복 및 섬유생활문화 ④

KoreaFashionNews | 입력 : 2016/11/2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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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족오는 고구려 각저총 쌍영총 덕흥리 고분 등에서 자주 나온다. 이들 고분 벽화에는 왼쪽에는 용을, 오른쪽에는 봉황을 거느리고 있다.  © TIN 뉴스

 

▣ 고구려, 마침내 길쌈장려(섬유진흥)를 시행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여름 6월,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373년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3년, 처음으로 법령을 반포하였다.

 

583년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25년 2월, 고구려사(高句麗史)에서 처음으로 농업정책이 언급되고 있는데, 임금은 급하지 않은 부역을 줄이고, 군읍(郡邑)에 권농사를 파견하여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을 권장토록 하였다.

 

600년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11년, 임금이 태학(太學) 박사(博士)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옛날 역사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고구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00권을 쓰고, 이것를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한 것이다.

 

▲ 평양 진파리 7호분에서 출토된 일중삼족오금동관식 - 삼족오 설화의 시원지는 고대 한반도이며 고구려에서 가장 화려하게 부활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무용총, 각저총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고분벽화 속의 사신은 동, 서, 남, 북을 지키고 있으며 사신의 중심에는 삼족오가 있다. 이는 즉, 삼족오가 고구려 시대의 상징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보이며 역사드라마 주몽에서 신격화된 삼족오는 고구려인들에게 통치철학의 이념처럼 강조되었다. 해의 정령신인 삼족오는 우리 문화의 구심점으로 인식되어 아름다운 현실문화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뒤를 이은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은 가장 위대한 태양의 후손이라는 뜻에서 원형의 태양 속에 삼족오를 그려 넣어 자신들의 문양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삼족오는 천손(天孫)의식을 갖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 되었다.     © TIN 뉴스

 

▣ 고구려, 백성을 위한 진휼정책을 펼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45년 고구려 민중왕(閔中王) 2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진휼(賑恤 ; 구제)하였다.

 

108년 고구려 국조왕 56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빨갛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임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18년 고구려 국조왕 66년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환(鰥 ; 홀아비), 과(寡 ; 과부), 고(孤 ; 고아) 그리고 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같은 해 겨울 10월, 임금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길 가에 앉아 우는 자를 보고 그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므로, 한 되나 한 줌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官穀)을 풀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구제곡을 빌려 주었다가, 같은 해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이에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273년 고구려 서천왕 4년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389년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 6년 봄,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으므로, 임금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424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2년 가을 9월, 큰 풍년이 들자 임금이 궁중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521년 고구려 안장왕 3년 5월, 임금이 졸본(卒本)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읍(州邑)의 가난한 자들에게 한 사람마다 곡식 1곡(一斛 ; 한 섬)씩을 주었다. 523년 안장왕 5년 겨울 10월, 기근이 들자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542년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12년 봄 3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와(瓦 ; 기왓장)이 날았다. 659년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18년 가을 9월, 범 9마리가 한꺼번에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

 

▲ 짐승얼굴무늬 - 수막새짐승얼굴무늬(귀면문)는 짐승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건축물이나 공예품에 사용되어 나쁜 것을 물리치는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고구려 기와에 나타나는 짐승얼굴무늬는 지안 퉁거우 지역의 무덤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어 상당히 일찍부터 기와무늬로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구려의 짐승얼굴무늬 수막새는 무늬의 선이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으면서도 예리하고, 부릅뜬 눈, 두 눈썹 사이의 혹, 힘을 준 코, 위로 올라간 수염, 크게 벌린 입 속에 앙증맞게 튀어나온 이 등에서 전체적인 조형감각의 힘과 해학성이 느껴진다.     © TIN 뉴스

 

▣ 고구려, 의복 등으로 주변국과 교역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77년 고구려 국조왕 25년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임금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05년 고구려 국조왕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범을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그해 겨울 10월, 동해곡(東海谷) 수령이 빨간 빛깔의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9자였다.

 

121년 고구려 국조왕 69년,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깔의 여우가죽 갖옷과 하얀 빛깔의 매와 하얀 빛깔의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330년 고구려 미천왕 31년,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고, 고시(楛矢 ;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를 주었다.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여름 6월, 진(秦)나라 임금 부견(符堅)이 사신과 부도(浮屠 ; 스님. 중)인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 왔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답례로 방물(方物 ; 토산물)을 보냈다.

 

43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23년 여름 6월, 임금이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제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다.

 

491년 고구려 장수왕 79년 겨울 12월, 임금이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魏)나라 효문(孝文)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하얀 빛갈의 위모(委貌 ; 관. 모자)를 쓰고, 삼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입고, 동교(東郊 ;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492년 고구려 문자명왕(文咨明王) 원년 봄 3월,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의관(衣冠), 복물(服物 ; 옷), 수레깃발 등의 장식물 따위를 보내주었다. 문자명왕의 이름은 나운(羅雲)이며,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아들 고추(古鄒) 대가(大加) 조다(助多 ; 쪼다. 바보)였다. 그러나 아들인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손자인 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장손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에 이르러서 죽자, 마침내 나운이 그 뒤를 이어 임금자리에 올랐다.

 

▲ 연꽃무늬 기와 - 천추총 정상부에 세워졌던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로 생각된다. 막새면 가운데는 볼록하게 솟은 반구형 씨방[子房]이 배치되고, 막새면을 부채살 모양으로 구획한 후 끝이 뾰족한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등 고구려 기와의 특징이 뚜렷하다.     © TIN 뉴스

 

520년 고구려 안장왕(安藏王) 2년 2월,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사신 강주성(江注盛)을 보내 의관(衣冠), 검패(劒佩 ; 차는 칼) 등을 보내주었다.

 

532년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2년 봄 3월, 위(魏)나라 황제가 의관(衣冠 ; 옷과 모자)과 수레깃발의 장식물 따위를 보내주었다.

 

549년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4년 가을 9월, 환도(丸都)에서 가화(嘉禾 ; 벼 이름)를 바쳤다.

 

590년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원년,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사신을 보내며 의1습(衣一襲 ; 옷 한 벌)을 보내주었다.

 

591년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년 3월, 수(隋)나라는 임금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복식을 보내주었다. 그해 여름 5월,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624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년 봄 2월, 임금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력(曆 ;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나라에서는 형부(刑部) 상서(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자료를 전해 주었으며, 그리고서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天尊)의 화상과 도법(道法 ; 도교)을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임금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 광개토대왕릉 글자를 새긴 기와 - 벽돌의 옆면을 구획한 후, 그 안에 글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글자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등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吉祥句]들이다. 무덤 위에 세운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되었다.     © TIN 뉴스

 

628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11년 가을 9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太宗)이 돌궐(突厥)의 힐리(頡利) 가한(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내주었다.

 

640년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23년 봄 2월, 당(唐)나라에 세자(世子) 환권(桓權)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수고를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임금이 당나라에 왕자(王子)와 자제들을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642년 영류왕 25년 11월, 임금이 서부(西部)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長城)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같은 해 겨울 10월, 개소문이 임금을 죽였다. 같은 해 11월,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임금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중(苑中)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3백단의 물품(직물)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지절사(持節使)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643년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년 3월, 개소문이 임금에게 말했다. 유교와 불교, 도교의 3교는, 무릇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儒 ; 유교)와 석(釋 ; 불교)은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道敎)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天下)의 도술(道術)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하건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임금이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겨 당나라에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당나라 태종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어주고, 동시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내주었다. 임금이 기뻐하며, 승사관(僧寺館)에 묶게 하였다.

 

▲ 집모양토기 - 평양시 평양철교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고구려 유일의 집모양[家形]토기이다. 네모난 지상식 건물에 우진각지붕이 올려진 형태로, 요즈음도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형태의 가옥 구조이다.지붕 전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골을 파서 기와지붕 형상을 표현하였으며, 건물 정면에는 안으로 통하는 두 개의 둥근 구멍과 그 구멍 사이로 네모난 홈이 파여져 있다. 이 구멍과 홈은 창틀이나 문을 표현한 출입구로 생각된다. 높이 8.3㎝에 불과한 작은 명기로서 무덤 부장용으로 5세기 대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와 같은 형태의 고상 창고를 부경(桴京)이라 불렀다.이 집모양토기도 당시 부경이라고 하는 고상 창고를 조형으로 하여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곡식이 가득 저장된 이 집모양토기(창고)를 무덤에 넣어줌으로써 사후 세계에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내세관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TIN 뉴스

 

▣ 고구려의 공복 및 일반 복식

 

◆ 삼국사기

 

삼국사기 잡지에 의하면, 고구려의 의복(衣服)의 제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이제 중국(中國)의 역대(歷代)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만을 기록하기로 한다.

 

북사(北史)에 일컫기를,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折風)을 썼는데 그 모양이 변(弁 ; 고깔)과 같았다. 사인(士人 ; 사대부)은 거기에 2개의 조우(鳥羽 ; 새의 깃털)를 더 꽂았다. 귀한 사람의 모자를 소골(蘇骨)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자라(紫羅 ; 붉은 빛깔의 견직물)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대주삼(大袖衫 ; 소매의 통이 큰 웃옷)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하얀 빛깔의 가죽띠를 허리에 두르고, 노란 빛깔의 가죽신을 신었으며, 부인(婦人 ; 부녀)들은 군유(裙襦)에 선(襈)을 덧붙여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 일컫기를, 고구려의 임금은 5채(五采 ; 다섯 빛깔의 무늬) 옷을 입고, 백라(白羅 ; 하얀 견직물)로 관(冠)을 만들어 쓰며, 가죽혁대에는 금구(金釦 ; 금단추)를 달았다. 대신(大臣)은 청라(靑羅 ; 파란 빛깔의 견직물)로 만든 관(모자)을, 그 다음 신분은 강라(絳羅 ; 빨간 빛깔의 견직물)로 만든 관을 쓰는데, 조우(鳥羽, ; 새의 깃털)를 양쪽 귀 부분에 꽂고 다양한 금은 단추를 달았다. 웃옷은 통소매요 바지는 통이 넓으며, 하얀 빛깔의 가죽띠를 허리에 두르고, 노란 빛깔의 가죽신을 신었다. 서인(庶人 ; 평민. 백성)은 갈의(褐衣 ; 칡으로 만든 옷. 거친 베옷)를 입고 변을 썼으며, 여자는 머리에 건괵(巾幗)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일컫기를, 고구려는 공회(公會 ; 공식 모임) 때 에서는 모두 금은(金銀)으로 된 금수(錦繡 ; 수를 놓은 견직물) 차림을 하였다. 대가(大加)와 주부(主薄)는 모두 머리에 책(幘 ; 머리쓰개. 두건)을 썼다. 그것은 중국의 관책(冠幘)과 같으면서도 후면이 없었다.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모양이 변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관꾸미개 - 고구려 관모인 절풍(折風)에 꽂았던 관 꾸미개이다. 세 개의 세움 장식이 남아 있는데,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를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였다. 이런 제작 기법은 신라 황남대총 남쪽 무덤의 은관(銀冠)과 의성 탑리 무덤의 금동관에서도 확인되어 두 지역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 TIN 뉴스

 

고구려의 관직은 그 연대가 오래 되어, 기록이 모호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이제 다만 고기(古記 ; 옛날 기록)와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 나타나 있는 것을 기록하여 지(志)를 만든다. 수서(隋書)에 일컫기를, 고구려 관직에 태대형(太大兄), 다음은 대형(大兄), 다음은 소형(小兄), 다음은 대로(對盧), 다음은 의후사(意侯奢), 다음은 오졸(烏拙), 다음은 태대사자(太大使者), 다음은 대사자(大使者), 다음은 소사자(小使者), 다음은 욕사(褥奢), 다음은 예속(翳屬), 다음은 선인(仙人) 등 12목(木 ; 등급)이 있으며 또한 내평(內評), 외평(外評)과 5부욕살(五部褥薩)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 일컫기를, 고구려의 관직은 12급(級 ; 등급)이 있는데, 첫째는 대대로(大對盧), 혹은 토졸(吐捽)이라 하며, 다음은 울절(鬱折)이니 도(圖 ; 도서)와 부(簿 ; 문부)를 주관한다. 다음은 태대사자(太大使者)라 한다. 다음은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이니, 이른바 조의(皂衣)란, 곧 선인(仙人)으로서 국정(國政)을 담당하는데, 3년에 한번씩 교체하되고 그 직책을 잘 처리하면 교체하지 않는다. 대체로 교대하는 날 복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서로 공격을 하는데, 임금은 대궐문을 닫고 지키다가 승리하는 자에게 정권을 맡긴다. 다음은 대사자(大使者), 다음은 대형(大兄), 다음은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은 제형(諸兄), 다음은 소사자(小使者), 다음은 과절(過節), 다음은 선인(先人), 다음은 고추대가(古鄒大加)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막리지(莫離支), 대막리지(大莫離支),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이라는 관직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일컫기를, 고구려는 후한(後漢) 시대에 나라의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대가(古鄒大加 ; 고추대가는 고구려의 빈객 접대를 맡는 관리로서 대홍려와 같은 것이다), 주부(主簿), 우태(優台),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 등이 있다. 일설에는 대관(大官 ; 큰 벼슬)으로서 대대로(大對盧)가 있고, 다음에 태대형(太大兄), 대형(大兄), 소형(小兄), 의사사(意俟奢), 오졸(烏拙), 태대사자(太大使者), 소사자(小使者), 욕사(褥奢), 예속(翳屬), 선인(仙人)과 욕살(褥薩)을 합하여 12등급이 있으며, 또한 다시 내평(內評)과 외평(外評)을 두어, 내외의 사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우리나라의 고기(古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관직에는 좌보(左輔), 우보(右輔), 대주부(大主簿), 국상(國相), 구사자(九使者), 중외대부(中畏大夫) 등이 있었다 한다.

 

▲ 봉황모양 꾸미개 - 평안북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1호 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의 하나로, 1918년 세키노 타다시에 의해 조사되었다. 조사 당시 무덤은 중앙부가 무너져 내려앉은 상태였다. 봉황모양꾸미개는 무덤의 널방(현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부뚜막,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얇은 금동판을 오려서 봉황의 옆모습을 만들었다. 역S자로 휜 몸에, 커다란 꼬리깃이 뻗어있는 모습으로, 날개는 별도로 만들어 결합하였지만,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 표면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무늬가 없어 단순한 느낌을 준다. 일직선으로 뻗은 두 다리 끝에 각각 하나의 못구멍이 있어 어딘가에 부착하였던 장식으로 생각된다. 비록 단순한 형태이지만, 봉황 특유의 당당함이 느껴진다.     © TIN 뉴스

 

◆ 바보 온달 이야기(고구려 백성의 의생활 흔적)

 

삼국사기 잡지에 온달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서 고구려 당시 일반 백성의 의복 및 생활습속의 일면을 더듬어 볼 수가 있다.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 때 사람이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걸식(乞食 ; 밥을 빌어 먹음)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파삼(破衫 ; 찢어진 옷)에 폐리(弊履 ; 해어진 신발)를 하고 시정(市井 ; 시장과 우물) 사이를 왕래(往來)함으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우온달(愚溫達 ;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었으므로 임금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그녀가 울 때마다 이런 말을 하였다.

 

마침내 딸의 나이가 이팔(二八 ; 16세)에 이르자 임금이 딸을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公主)가 대답하기를 “대왕(大王)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匹夫)도 욕식언(欲食言 ;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 ; 임금)는 무희언(無戱言 ; 농담을 하지 않는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화를 내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너의 갈길 가는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어시(於是 ; 이에), 공주는 보물 천(釧 ; 팔찌. 가락지) 수십매(數十枚 ;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宮 ;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맹노모(盲老母 ; 눈먼 늙은 어머니)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면(綿 ;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天下)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유피(楡皮 ;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림(山林 ; 산 속)에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이 보였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호귀(狐鬼 ; 여우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시문(柴門 ; 사리나무로 만든 집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母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필(匹 ; 베필.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할 수가 없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1두(一斗 ; 한 말)의 속(粟 ; 조. 기장. 곡식)도 방아로 용(舂 ; 찧다)할 수가 있고, 1척(一尺 ; 한 자)의 포(布 ; 베)도 바늘로 봉(縫 ; 꿰매다)할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동심(同心 ; 마음을 맞추다)만 한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천(金釧 ; 금팔찌)를 팔아서 전택(田宅 ; 집과 밭), 노비(奴婢 ; 남녀의 종), 우마(牛馬 ; 말과 소), 기물(器物 ; 집기. 세간) 따위를 사들이니 살림살이 용품들이 모두 구비되었다.

 

▲ 금동신발 - 금동 신발의 바닥판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하나의 금동판에 사각추 형태의 금동못 40여 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신발 앞쪽은 버선코처럼 조금 들려 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두 개씩 짝을 이루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뚫려 있어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동신발은 직접 신고 활동하기에는 불편해 실생활에 사용했다기보다는 의례용 또는 껴묻거리[副葬用]로 보인다.고구려 금동신발은 신라나 백제의 금동신발에 비해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안(集安) 삼실총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 무사는 바닥에 못이 박힌 신발을 신고 있어 쇠못이 박혀 있는 신발이 금동신발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 TIN 뉴스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시인(市人 ; 시장 사람)에게서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선택하되, 병수(病瘦 ; 질병이 들어 여위다)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라고 하니 온달이 그대로 말을 사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매년 봄 3월 3일을 기하여 낙랑(樂浪)에 있는 구(丘 ; 벌판. 언덕)에 모여서 사냥하여 잡은 저(猪 ; 돼지)와 록(鹿 ; 사슴)으로 하나님과 산신, 물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아울러 그 날이 되면 임금도 사냥을 나가는데 군신(群臣 ; 여러 신하)와 5부(五部)의 병사, 사대부들도 모두 따랐다. 이에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 서서 달리고, 또한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임금이 불러서 그 성명(姓名)을 듣고 매우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이 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공격하자 임금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先鋒)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극(大克 ; 대승)하였다. 공(功)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임금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가탄(嘉歎 ;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이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임금의 총영(寵榮 ;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권(威權 ;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양강왕(陽岡王 ;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新羅)가 우리의 한북(漢北 ; 한강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郡縣)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百姓)들이 통탄하며 부모(父母)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不肖)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일왕(一往 ; 단번)에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류시(流矢 ;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를 장례지내려 하였으나 구(柩 ; 관. 널)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면서 “사생(死生 ;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라 말하고, 마침내 관을 들어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 하였다.

 

▲ 요녕성 평강유적 출토된 고구려 초기 금장식 -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서 동부여와 백제 및 신라의 거주민들은 당연히 단군의 후손인 추모왕이 세운 고구려왕의 속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고조선의 영토 뿐만이 아니라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재건하고자 했던 것으로 자신들이 고조선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다물’은 고구려의 정치이념이었으며 고구려의 전쟁사는 이 이념과 맞물려 나갔던 것이다.이러한 고구려 사람들의 정치이념은 고구려 초기에 해당하는 요령성 평강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삼족오 아래 곰과 호랑이가 묘사되어 단군신화의 내용을 표현한 금동장식품에서도 표현되었다.     © TIN 뉴스

 

◆ 기타 사서의 기록들

 

동사강목에 의하면, 동국(東國 ; 우리나라)의 의복제도가 동사(東史)에 보이지 않으므로 중국역사에 나타난 것만을 언급한다면, 후한서에, 고구려의 공회(公會) 의복은 모두 수를 놓은 직물에 금은(金銀)으로 장식하였다.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모두 책(幘)을 쓰는데 이는 관책(冠幘)과 같으나 뒤가 없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하였고, 북사(北史)에는, 고구려는 모두 머리에 절풍을 썼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으며, 사인(士人 ; 사대부)은 거기에 2개의 깃털을 꽂았다. 귀자(貴者 ; 귀족)는 그 관을 소골(蘇骨)이라 하여 대부분 자라(紫羅 ; 붉은 빛깔의 견직물)를 사용하여 만들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였다. 소매가 큰 적삼과 통이 큰 바지, 하얀 빛깔의 가죽띠, 노란 빛깔의 가죽신을 착용하고, 부인(婦人)의 치마와 웃옷(저고리)에는 가선을 붙였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동일하다. 만약 조배(朝拜)나 제사(祭祀) 때에는 그 관(冠 ; 모자)의 양끝에 날개를 붙이고 전시(戰時)에는 하지 않았다. 내솔 이하의 관(冠)은 은화(銀花)로 장식하고 장덕은 자줏빛 띠, 시덕은 검은 띠, 고덕은 붉은 띠, 계덕은 푸른 띠, 대덕과 문독은 노란 띠, 무독부터 극우까지는 하얀 띠를 띠었으며,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처녀는 머리를 땋아 뒤로 늘였는데, 시집을 가면 머리를 두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말아 올리었다. 옷은 도포와 비슷하며 소매는 약간 컸다. 복색(服色)은 하얀 빛깔을 숭상하였는데, 부인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둘렀으며 잡채(雜綵)와 방울(구슬)로 꾸몄다고 하였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한(漢)나라 때 항상 현토군(玄菟郡)에 나아가서 한나라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 갔다.

 

남제서에 의하면, 고려(고구려)는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관(冠)은 일량(一梁)의 절풍(折風)을 쓰는데, 이를 책(幘)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사신이 국도(國都)에 있을 때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이 놀리기를, 옷이 맞지 않는 것은 몸의 재앙이란 말이 있는데,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니, 이는 바로 옛날 변(弁 ; 고깔)의 유풍이다고 답하였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남제(南齊) 영명(永明) 때에 고구려 사신이 왔는데, 좁은 바지를 입고 절풍을 썼으므로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이 그 관(冠)을 놀리니, 답하기를 이것은 옛날 고깔에서 유래한 모양이다고 하였다.

 

▲ 여러가지 신발(고구려)     © TIN 뉴스

 

후위서에 의하면, 고구려는 알사(謁奢), 대형(大兄)은 머리에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모양이 새의 깃털을 꽂은 것과 같으며, 귀천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백성들은 모두 포백(布帛 ; 직물)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491년 후위(後魏) 태화(太和) 15년에, 고구려 임금 고운(高雲)에게 의관(衣冠)과 복물(服物)을 보내주었다.

 

후주서에 의하면, 고구려 남자들은 소매가 긴 적삼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하얀 빛깔의 가죽띠를 허리에 두르며, 노란 빛깔의 가죽신을 신는다. 그들의 관은 일러 골소(骨蘇)라고 하는데, 대부분 자주색 직물로 만들었고, 금과 은으로 드문드문 꾸몄으며, 벼슬이 있는 사람은 또 그 위에 새의 깃털 2개를 꽂아 다름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부인들은 치마와 속옷을 갖추어 입고, 옷자락이나 소매에는 모두 선을 둘렀다.

 

당서(唐書)에 의하면, 고구려 임금은 5채(五綵 ; 다섯 가지 빛깔)를 입고 백라(白羅 ; 하얀 빛깔의 견직물)로 관(冠)과 혁대를 만들었는데,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청라(靑羅 ; 파란 빛깔의 견직물)의 관이요, 그 다음은 강라(絳羅 ; 빨간 빛깔의 견직물)의 관인데, 조우(鳥羽 ; 새의 깃털) 둘을 이(珥 ; 귀쪽)에 꽂았고, 금과 은을 섞어 테를 둘렀으며, 웃옷(저고리)은 통소매이고, 바지도 통이 크며 하얀 빛깔의 가죽띠와 노란 빛깔의 가죽신을 신었다. 서인(庶人 ; 남자 백성)은 갈의(褐衣 ; 칡으로 만든 옷)을 입고 변(弁 ; 고깔)을 쓰며, 여자는 머리에 건괵(巾幗 ; 머리쓰개. 수건)을 썼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의복과 관(冠), 신발을 모두 금색으로 꾸몄다. 신당서(新唐書) 태직외열전(太直外列傳)에, 당(唐)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2가지 보물을 얻었는데, 그 하나가 자금대(紫金帶)이다 라고 하였다.

 

다음호에 ‘고구려시대의… ⑤’가 이어집니다.

 

 

▲ ©TIN 뉴스

 

 

박원호TINNEWS

영남지사장(논설위원 겸직)

前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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