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에 펼쳐져 있는 ‘고려시대의 섬유풍속 이야기’

박원호의 섬유역사산책 - 2
KoreaFashionNews | 입력 : 2016/01/22 [10:43]
▲ 고려시대가 배경인 영화 ‘쌍화점' 中 한장면 © TIN 뉴스

 

▣ 들어가는 말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하 ‘고려도경’으로 표기)’를 읽어보면 고려시대의 섬유풍습과 관련된 내용이 일부 나오는데, 이에서 고려시대의 섬유풍속만을 발췌하여 당시 섬유문화의 일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긍은 고려도경 책머리에서 ‘이제 신이 저술한 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면 먼 이역땅이 다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는 옛날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遺制)이다. 그렇기는 하나 숙소가 정해진 나에게는 파수병이 지켜 문 밖을 나가 본 것이 고작 5∼6 차례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고려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터득할 수 있었는데,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선화 6년(1123년) 8월 6일.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賜緋魚袋) 신(臣) 서긍(徐兢) 근서(謹序)’라 적어놓고 있다.

 

☞ 고려도경과 서긍 :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중국 송나라의 사신이었던 서긍(徐兢, 1091년 - 1153년)이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서로서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며,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이 모두 40권이다.

 

▣ 고려의 주거풍습에 대하여


고려는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각 읍(邑)에는 가옥을 만들고, 주(州)에는 마을 문을 세웠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쌓아 그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고려의 왕성은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마치 벌집과 개미구멍같이 생겼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주현(州懸)의 설치에 있어 그 명칭이 서로 맞지 않고, 그저 취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고려의 왕성에는 본래 방시(坊市)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孫)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시장거리나 민가는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뿐이다.

 

왕성에는 여러 외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북창문의 경우 포백(布帛), 신탄(薪炭 ; 땔나무와 숯) 등이 많이 지나다니는 문이라고 하며, 또 왕성에는 누관(樓觀)도 있는데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놀러 올 때면 그 안에 있던 왕족들이 비로소 고운 견직물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당시 풍광을 묘사한 문구 중에 술잔을 들고 축수하니 ‘곤룡포상서광부(袞龍布上瑞光浮 ;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 충북 제천에 위치한 사극 태조 왕건 수상 촬영장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시대 전함 복원품 © TIN 뉴스

  

▣ 무역(상거래)에 대하여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오게 되면 사람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는데, 붉고 검은 직물은 모두 매양 화려하고 좋도록 힘쓴다고 한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하나,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 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 노소, 관리, 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銀甁)으로 그 가치를 표준 하여 교역하고, 일용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 관복에 대하여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이마에 문신을 하며, 발이 서로 교차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고려는 (고)조선시대 때부터 이미 밭갈이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알았으므로 마땅히 의관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루고, 나머지는 혹 진사(進士)를 하여 뽑히거나, 혹 재물을 바치고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 받는 이직(吏職)까지도 등급이 있으니, 그러므로 직(職)이 있고, 계(階)가 있고, 훈(勳)이 있고, 사(賜)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衛)가 있다.

한사(漢史 ; 한나라 역사서)에 그들이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모두가 다 직물에 수를 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 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변(弁 ; 고깔)과 같다고 하였다. 중국 당나라 초에 차츰 오채(五采)의 옷을 입어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도 없앴다고 한다.


(신라복식을 이어받은 고려는 광종 때 후주의 복시제도를 받아들였으며, 그 뒤 거란에서 변복을 들여오고, 문종 때에는 중국 송나라 신종이 어의 2벌을 보내 줌으로서 일부에서 송나라 복식을 답습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 드라마 ‘신의’ 공민왕 역의 배우 류덕환 © TIN 뉴스

 
고려왕의 일상복은 높은 오사모(烏紗帽)에 소매가 좁은 상포(緗袍 ; 담황색의 옷)를 입고, 자라(紫羅)로 만든 넓은 늑건(勒巾 ; 허리띠)을 두른다. 이 허리띠 사이사이에는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았다. 나라의 관원과 사민이 모여 조회할 때에는 복두를 쓰고 속대를 띠며,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을 쓰고, 옥규(玉圭)를 든다. 다만, 중국의 사신이 가면 자라의 공복을 입고, 상아로 만든 홀(笏)을 들고 옥대를 띠고, 행례의 범절이 아주 신절(臣節)에 조심한다. 혹 평상시 쉴 때에는 조건(早巾)에 흰 모시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고려의 관직명은 일정하지 아니하여서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중국 송나라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관복도를 그려서 설명에 덧붙인다(안타깝게도 오늘날, 고려도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의 관제는 중국 당나라 때처럼 아홉 등급이 있는데, 전세 고구려의 신하의 복식은 청라(靑羅 ; 파란 직물)로 관을 하고, 강라(絳羅 ; 붉은 직물)로 이(珥 ; 원래는 귀걸이이지만, 여기서는 귀를 싸는 장식)를 하고, 조우(鳥羽 ; 새의 깃털)로 장식하더니, 영관복(令官服)의 경우 요즈음 고려나라의 관원들은 거의 다 자문나포(紫文羅袍 ; 자주 무늬가 있는 엷은 직물)를 입고, 안쪽이 비치는 깁으로 만든 복두를 쓰며, 허리에는 옥대를 띠고, 금어(金魚)를 두른다.

 

국상(國相 ; 재상)의 복색은 자문나포에 구문금대(毬文金帶 ; 둥근 문양이 있는 금띠)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근신[近侍]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구문금대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종관의 복색은 자문나포에 어선금대(御仙金帶)를 띠니, 왕의 특별한 은영(恩榮)을 입은 자가 다 이와 같은 것을 입으며, 왕의 세자 및 왕의 형제도 또한 그러하다.

 

또 경감(卿監)의 복색은 비문나포(緋文羅袍)에 홍정서대(紅鞓犀帶 ; 붉은 가죽 바탕의 물소 뿔로 만든 띠)를 하고, 이에 은어대(銀魚帶)를 차며, 조관(朝官)의 복색은 비문나포를 입고 흑정각대(黑鞓角臺)를 띠고, 은어대(銀魚帶)를 차며, 서관(庶官)의 복색은 녹의(綠衣)에 목홀(木笏)을 들고, 복두를 쓰고, 오정(烏鞓 ; 검은 가죽 띠)을 한다. 이직(吏職 ; 서리)의 복색은 서관의 복색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녹의에는, 때로는 진하고 엷은 것도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는, '고려는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푸른 옷을 입는다' 하나, 이제 물어 보니 그것은 모두 다 틀린 말이다. 따라서 이 나라는 백성이 가난하고 그 풍속이 검약하여 도포 하나의 값이 거의 은 한 근 가격이니 항시 빨아서 다시 물들이니 색이 진하여 푸른 것 같니 보일 뿐이지, 한 가지 복색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부(省府)의 보리(補吏)는 유품(流品)에 한하지 않고 귀가(貴家)의 자제도 때로는 그렇게 한다고 한다. 지금 이 청복(靑服)은 곧 서리(胥吏)를 세습하는 자만이 입는다고 한다.

 

▣ 의물에 대하여


고려 왕실의 의물(儀物)에 대한 것을 고려도경에서 살펴보면, 먼저 반리선(盤螭扇)은 둘이 있는데, 이는 강라(絳羅)로 만들어 주병(朱柄 ; 붉은 자루)에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가운데에 단리(單螭 ; 한 마리의 작은 용)가 꾸불꾸불 굼틀거리는 그림을 수놓았는데, 그 제도가 뿔은 하나요, 비늘은 없고, 그 모습은 용(龍)과 비슷하되, 대개 교구(蛟虯 ; 전설상의 용)류이다. 왕이 행차할 때면 앞에 서서 금포(錦袍)를 씌워 바람을 막는데, 친위군이 이를 잡고, 잔치할 때는 뜰 가운데에 세우되, 예가 끝나면 거둔다고 한다. 이밖에 쌍리선(雙螭扇), 수화선(繡花扇), 우선(羽扇), 곡개(曲蓋), 청개(靑蓋), 화개(華蓋), 황번(黃幡), 표미(豹尾 ; 표범 꼬리를 단 의장), 금월(金鉞 ; 장대 끝의 표식), 구장(毬杖 ; 격구를 할 때 쓰는 공채), 기패(旂旆) 등이 각종 행사에 사용되고 한다. 

 

▲ 고려 말 공민왕이 직접 그린 '천산대렵도' © TIN 뉴스

  

▣ 고려시대 때 군용으로 쓰인 섬유문물에 대하여

 

▲ 고려시대가 배경인 영화 ‘쌍화점' 中 한장면© TIN 뉴스

고려 왕성의 장위(仗衛 ; 의장과 호위)에는 다른 군(郡)에 비하여 가장 성대하고, 날랜 군사를 모두 모으며, 백성은 16세가 되면 누구나 군역에 충당된다. 오직 공적인 일에 사역되게 되면 의복으로 구별할 뿐이다. 투구와 개갑(鎧甲 ; 갑옷)은 아래 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 ; 옆이 넓게 트이고 소매가 큰 도포. 봉의)과 같아서 형상이 매우 궤이(詭異)하다.

 

금화고모(金化高帽 ; 모자 위에 금화로 꾸민 모자)는 거의 2자나 되고, 금의청포(錦衣靑袍 ; 옷 이름)에 헐렁하게 맨 띠는 사타구니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이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직물 옷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 같다.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는 구문금포(毬文錦袍 ; 환상 무늬가 있는 도포)를 입고, 도금한 띠를 두르며, 전각복두(展脚幞頭 ; 후면 좌우에 양 뿔이 있는 모자)를 쓰니 대략 중국의 복식제도와 비슷하다. 작은 깃발을 가지고 6군(六軍)을 호령하니 이것이 군위(軍衛)의 대장이다.

 

신호좌우친위군장(神虎左右親衛軍將) 또한 구문금포에 도금한 띠를 두르며, 모두(帽頭)의 뿔을 꺾어 올려서 오른쪽으로 조금 굽게 구부렸는데, 금화(金化)로 장식하였다. 왕이 출입할 때에는 10여 인이 우선(羽扇 ; 새 깃털로 만든 부채)과 금월(金鉞 ; 금도끼. 의장의 하나)을 잡고 시종한다.

 

신기군(神旗軍)은 가죽으로 머리를 덮었는데, 상부에 목비(木鼻)를 만들어 짐승의 이마 모양이 되게 한 것은 용맹스러움을 표시한 것이다. 붉은 저고리는 짧고 뒤에 또 두 쪽의 옷 가리개를 덮붙이고 있는데, 이는 짐승 무늬로 장식이 되어 있다. 조서(詔書)를 받거나 예(禮)를 받을 때는 앞에 진열하여 오방대신기(五方大神旗)를 펼쳐 수레에 싣고 향하는 곳을 따라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수레마다 10여 인씩 탄다. 산길이 험난하고 높은데다 마침 큰 더위에 땀이 흘러 등을 흠뻑 적시니, 다른 장위군에 비하여 가장 수고가 많은 것 같다.


고려군의 의장제도는 매양 재제(齋祭 ; 제사 이름)와 사천(祀川)할 때는 10면에 큰 기를 세우며, 각각 그 방위의 빛깔에 따라 신물(神物)을 그리는데, 이를 일러 ‘신기(神技)’라 하니, 그 제도의 쓰임이 매우 넓다. 깃발 마다 직물을 몇 필(匹)씩 쓰는데, 아래쪽에는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고, 수레마다 붉은 옷을 입은 장위군(仗衛軍) 십수 인이 끌고 가다가 왕이 있는 곳을 따라 차례로 서 있게 한다. 4면에는 각각 큰 새끼줄을 달아 풍세(風勢)에 대비하는데, 그 높이가 10여 장(丈)이나 된다. 나라 사람들은 신기를 세운 것을 바라보면 감히 그곳을 향하여 가지 못한다고 한다.

 

▣ 일반 의복풍습에 대하여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4민(四民)의 업(業) 중에서 우독 유(儒 ; 선생. 글을 아는 사람)를 귀히 여김으로, 이 나라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평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의 기능은 모두가 장인 못지않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고을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다.


지사의 복식은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을 쓰고, 검은 오주(筽紬)로 웃옷을 하고, 검은 띠에 가죽신을 신고, 공(貢)에 들면 모자를 더 쓰고,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안을 크게 돌게 하여 영관을 삼는다고 한다.


농민과 장사치는 빈부를 가릴 것 없이, 다 백저포(白紵袍)를 입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빈부를 구별한다. 나라의 벼슬아치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신분을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향리(鄕吏)나 백성은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침의(寢衣)의 제도는 홍황색으로 겉감으로 하고, 흰 모시로 안을 댔는데, 안이 겉감 보다 크고 네 변두기가 각각 1척이 넘는다.


저상(紵裳)의 제도는, 겉감과 안이 6폭인데, 허리에는 가로 두른 깁을 쓰지 않고 두 개의 띠가 매어져 있다. 삼절의 자리마다 각각 저의(紵衣)와 함께 마련해 놓게 해서 목욕할 때 쓰도록 한다. 저의는 곧 속에 입는 홑옷을 일컫는다. 동이의 풍속은 순(純 ; 가장자리에 두른 선)과 영(領 ; 옷깃)을 쓰지 않고,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없이 다 저의를 입는다.


고려는 장인의 기술이 지극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 테면 복두소(僕頭所), 장작감(將作監)이 그 곳이다. 이들의 일상복은 흰 모시 도포에 검은 건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광에서 붉은 도포를 내린다.


민장(民長)은 백성 가운데 부족(富足)한 자를 뽑아 시키되, 그 마을의 큰일이면 관부(官府)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그 복식은 문라(文羅)로 건(巾)을 하고, 검은 주(紬)로 갖옷을 하고, 혹각대를 띠고, 검은 가죽의 구리(句履 ; 신발 이름)를 신으니, 이는 아직 공(貢)에 들지 않은 진사(進士)의 복식과 서로 닮았다.


고려의 두건은 다만 문라를 중히 여겨 건 한 개의 값이 쌀 한 섬 값이 되니,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밑천도 없고, 또 알상투를 하면 죄수(罪囚)와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죽관(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전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남자들은 짧은 갈(褐 ; 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 1970년대 서울 방배동에서 목우(木偶) 6점이 출토되었는데, 평정건을 쓰거나 변발을 하고 있어 고려 후기 인물상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것은 그 인물상을 근거로 복원한 고려말 사대부의 복식이다. © TIN 뉴스

  

▣ 고려시대의 부인복과 생활 풍습에 대하여


삼한(三韓)의 의복제도는 염색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에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使)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를 넣은 직물이나 꽃무늬를 넣은 옷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붙잡아 죄 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모시 저고리에 노랑 치마인데, 위쪽으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쪽으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특별히 구별이 없다 한다.


고려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직물로 된 조라(早羅 ; 너울. 멱라)를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든다고 한다. 폭의 길이는 여덟 자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 모시로 포(袍 ; 도포)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직물로 넓은 바지를 만들어 입는데 그 안을 생초(生綃 ; 얇은 견직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 색깔의 넓은 허리띠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을 달고, 직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으로 신분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 자리를 깔고서 시비(恃妃)가 늘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다고 하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 유녀(遊女 ; 기생)의 복색에도 특별히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와 부인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 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부인의 머리는 귀천이 한 가지로 오른 쪽으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깁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 가난한 집에서는 다만 너울이 없는데 대개 그 값이 은 한 근과 맞먹어 구입할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 금제(禁制)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 두르는 치마를 입되 여덟 폭으로 만들어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는데 주름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부귀한 집의 자제나 처첩들의 치마는 7-8필을 이은 것이 있으니 더욱 우스운 일이다.


사신이 처음에 성(城)에 들어 갈 적에 길 옆 누관 사이에 난간에 의지하고 있는 귀녀를 가끔 보았다. 이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겨우 열 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머리를 풀지 않았고, 황의(黃衣)는 또한 여름 복식으로는 마땅한 것이 아니기에, 시험 삼아 이를 힐문하였으나 끝내 이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떤 이가 “왕부(王府) 소아의 옷이다”고 하였다.

 

서민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는데,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흑승(黑繩 ; 검은 끈)으로 대신할 뿐이다.


고려 궁부(宮府)에는 잉첩(媵妾)이 있고, 관리에게는 첩이 있는데, 백성의 처나 잡역에 조사하는 비자(婢子) 모두 복식이 서로 비슷하다. 그들은 힘든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너울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아니하고, 머리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접어 올리며 옷을 걷고 다닌다. 손에는 부채를 잡았으나 손톱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많은 사람들이 붉은 한삼으로 손을 가린다.


그리고 고려의 법이 관비(官婢)를 두어 대대로 대물림하기 때문에 왕부로부터 관아나 도관(道觀), 사찰(寺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을 주어 노역을 바치게 하였다. 그들이 일할 적에 어깨에 멜 힘이 없으면 짐을 등에 지게 하는데, 그 행보가 빨라 남자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이들의 지고 이는 일에 대한 그 노고는 남자들과 매양 한 가지다.


물이나 쌀, 밥, 마시는 것 따위를 다 구리항아리에 담아야 함으로 어깨에 메지 않고 대부분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키며 다니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 고려도경의 귀부녀(貴婦女) 복식을 보면 남자와 같은 백저포를 입었다는 구절이 있다. 가을과 겨울에는 황색 치마를 입었는데, 공경대부의 아내로부터 서민의 아내와 유녀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없다. © TIN 뉴스

  

▣ 잡속(雜俗)에 대하여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유일한 문물예의(文物禮義)의 나라라 일컫는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실제로는 풍속이 박잡하여 야만스러운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했다.


고려의 풍속은 밤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더욱이 사신 접대하기를 매우 공손하게 한다. 항상 잔치가 파하면 한 밤 중에 넘어 산이나 섬, 주, 군의 교, 정, 관, 사에서는 모두가 다 뜰 가운데 홰를 묶어 불을 밝히고, 산원(散員)들이 이 홰를 잡고 사신이 숙관(宿館)에 돌아갈 때면 앞에 나열하여 서로 나란히 간다.


부인의 출입에도 역시 말과 노복, 청개(靑蓋)를 공급하는데, 이는 공경(公卿)이나 귀인의 처일 경우 따르는 종자가 2∼3인 밖에 되지 않는다. 부인들은 검은 깁으로 너울을 만들어 쓰는데 끝이 수레 위쪽을 덮으며, 또 갓을 씌우기도 한다. 왕비와 귀부인은 다만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輿 ; 수레)는 없다.


옛 사서에 고려에 대하여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들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나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 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모두가 전혀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거나,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근로하여도 전혀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깃는 것도 대개 시내 가까운데서 하니, 위에 록거로(鹿車盧 ; 도롱태)를 걸어서 함지박으로 물을 깃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고려의 나라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밭들이 산간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갈고 일구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다리나 층층계와도 같다. 고려의 국속에는 감히 사전(私田)을 가질 수가 없게 되어있고, 대략 구정(丘井)의 제도 같은 것이 있는데 관리나 민병(民兵)에게 등급의 고하에 따라 나라에서 땅을 내려준다.


국모(國母)나, 왕비, 세자, 왕녀에게는 다 탕목전(湯沐田 ; 땅 이름)이 있는데, 150보(步)를 1결(結)이라 한다. 백성이 8세가 되면 관에 문서를 내어 전(田)을 분배받되 결수에 차이가 있고, 국관(國官) 이하 병리(兵吏), 구사(驅使), 진사(進士), 공기(工技)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일이 없으면 밭에서 일하게 하고, 변방의 수자리에는 쌀을 대어준다.


고려의 농사에는 황량(黃梁), 흑서(黑黍), 한속(寒粟), 호마(胡麻 ; 참깨), 보리, 밀 등이 있고, 쌀에는 멥쌀은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소의 쟁기나 농구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고려의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며,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공을 보는 것은 적다.

 

나무꾼은 원래 전업이 없고 다만 일의 틈이 있으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 밖의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에 의해 사위가 있다하여 나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 

 

▲ 고려도경에 근거해 몽수(蒙首)를 착용한 여인의 복식 © TIN 뉴스


고려의 풍속에는 주산(籌算)이 없어 관리가 돈이나 천을 출납할 때, 회계 때는 조각나무에 칼을 가지고 그 수를 그으니, 한 물건을 기록할 때마다 한 자국을 긋고 일이 끝나면 내버리고 다시 쓰지 않으며, 두었다가 계고(稽考)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고려의 지세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는 많으며, 길삼의 능력도 뛰어나다. 우양(牛羊)의 축산능력도 좋으며, 여러 가지 해산물의 아름다움이 있다. 고려에서는 저(紵 ; 모시)와 마(麻 ; 삼)를 스스로 다 많이 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베옷을 많이 입는다. 이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살(薩 ; 이)’이라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玉)과 같고 그 폭이 매우 좁고 세밀한 것도 있다. 왕과 귀신(貴臣)들은 다 이것을 입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양잠(養蠶 ; 누에치기)에는 서툴러서 사선(絲薩)과 직임은 다 장사치를 통하여 송나라의 산동이나 민절지방으로부터 사 들인다.


극히 좋은 문라화릉(文羅花綾)이나 긴사(緊絲 ; 매듭에 쓰이는 실 같은 것), 금(錦 ; 견직물 이름), 모직물 따위는 잘 짜는데, 일전에 북노(北虜 ; 나라 이름. 여진)에서 항복해 온 병졸에게 섬유를 만드는 뛰어난 공기(工技)가 있으므로 이를 배워서 지금은 그 기술이 더욱 기교(奇巧)하고, 염색도 그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고려의 종이는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히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게 하며, 좋고 낮은 것은 몇 등급이나 된다고 한다.


힐막(纈幕)은 옛날 제도가 아니다. 선유(先儒)들의 말로는 직물을 이어서 물들여 도안을 하여 만든 것을 ‘힐(幕)’이라고 한다고 한다. 고려의 습속에 지금 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다. 그 바탕은 본래 무늬가 있는 깁이고, 도안의 빛깔은 곧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참으로 볼만하다.


이 밖의 의물에는 장막으로 쓰이는 수막(繡幕)을 비롯하여 수도(繡圖), 좌탑(坐榻), 연대(燕臺), 와탑(臥榻), 문석(文席), 문유(門帷), 수침(繡枕) 등이 있다.


화탑선(畵榻扇 ; 부채 이름)은 금이나 은을 칠해서 장식하고 거기에다가 이 나라의 산림(山林)이나, 사람, 마(馬 ; 말), 여자(女子)의 형태 따위를 그려 넣는다. 이는 고려인들은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그린 의복을 보니 정말 그러했다. 삼선(杉扇)은 그리 잘 만들지 못한다. 단지 일본의 백삼목(白杉木)을 종이같이 쪼개어서 채색 실로 꿰어 깃과 같이 이어나간 것으로 역시 바람을 낼 수 있다.

 

백접선(白摺扇)은 대를 엮어서 뼈대를 만들고 등지(藤紙)를 말라서 덮어씌우는데, 간혹 은이나 동의 못으로 장식하기도 한다고 한다. 대의 수효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친다. 심부름을 하거나 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슴이나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데 쓰기가 퍽 간편하다.


송선(松扇)은 소나무의 부드러운 가지를 가져다가 가늘게 깎아서 줄을 만들고, 그것을 두드려 실로 만든 후에 짜낸 것이다. 위에는 꽃무늬가 있는데 천등지교(穿藤之巧 ; 꽃을 뚫고 지나간 등의 기교)에 못지않다. 다만 왕부(王府)에서 사자(使者 ; 사절단)에게 주는 것이 가장 잘 만들어진 것이다. <끝>


초구(草屨 ; 신발 이름. 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매우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이것을 신는다.


초점(草笘)의 용도는 중국에서 쓰이는 포대와 같은 것이다. 그 형태는 망태기와 비슷한데 풀을 엮어서 만든다. 무릇 쌀이나 밀가루, 땔나무, 숯 따위를 다 그것을 가지고 담는다. 산길을 갈 때 수레가 불편하면 흔히 그것에 담은 것을 마필에 싣고 다니기도 한다.


막선(幕船 ; 배 이름)의 위는 푸른 천으로 방을 만들고, 아래는 장대로 기둥을 대신하고, 네 귀퉁이는 각각 채색 끈으로 맨다.

 

 

▲ ©TIN 뉴스

 

박원호 TINNEWS
영남지사장(논설위원 겸직)
前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본부장
whpark@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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